2009년 12월 30일 수요일

(모드2)글쓰기의 공중부양 : 언어의 연금술사 이외수가 전해주는 신비한 문장백신



 이 책은 무슨 책이야?
응 그 괴물인가 쓴 아저씨 있잖아 그 아저씨가 쓴 책인데 글쓰기 방법 알려주는 책이래

재밌어?
읽을 만 해

보니까 글 좀 잘 쓰겠든?
그건 모르겠어 어차피 방법 적어놓은 책이라 내가 직접 해봐야지 뭐 거기 써있는거 천천히 해볼까 생각중이야

뭐 하라는데?
생어인가 채집해서 노트같은거 만들고 이리저리 사물에 대해 의문 가져보래 궁극적으로는 심안으로 사물을 파악하라네.

글쓰는 방법만 써있어? 어렵겠네
아니 잼나는 일화같은 것도 있고 예시같은 것도 나름 되 있어서 읽기 편해 근데 뭐 이런 책이 다 그렇듯 실천하기는 힘들지.

사고는 싶어?
응 첨엔 후딱 읽었는데 , 글쓰기 방법 말고도 두고 두고 볼 만한 내용도 있어서 사고 싶어.

가장 기억남는 건 뭐야.
모든 거에 애정을 가지라는 것. 나도 좀 그러고 싶다.

(모드1)글쓰기의 공중부양 : 언어의 연금술사 이외수가 전해주는 신비한 문장백신

<목차>
공중부양에 대한 일화
글이란 무엇인가

1부 단어의 장
2부 문장의 장
3부 창작의 장
4부 명상의 장

마지막으로 던지는 질문 하나
체험의 글 : '나는 당신이다' _ 기노 / 이외수의 '글쓰기의 공중부양'을 소개하며

<소개>
<글쓰기 공중부양>은 소설가로 유명한 이외수씨가 글쓰는 방법을 전해주는 지침서이다. -짤막한 소개-
<글쓰기 공중부양>은  단어, 문장 , 창작 , 명상의 네 장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장은 세부 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저자는 각장에 대한 설명과 함께 예시를 들어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구성-
 저자는 단어를 채집하고 다르게 생각해보는 일부터 문장을 다루는 법, 나아가 창작을 하는 법까지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기본적인 글쓰기 방법부터 창작하는 응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을 배울 수 있다.-가능성 및 필요-
<주제>
 이외수가 이 책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한 애정이다. 저자는 사람의 눈을 얼굴에 붙어 있는 육안 두뇌에 붙어들어있는 뇌안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는 심안 , 영혼 속에 간직되어 있는 영안으로 나눈다. 저자는 일차적으로 속성과 현상을 육안과 뇌안으로 파악하고 본성과 본질을 심안과 영안으로 파악하라고 주문한다.
<읽은 기간 및 장소>
3일에 걸쳐 네번끊어 읽음
장소 지하철    도합시간 모름  읽은 속도 빠르게
<구한 방법> 도서관 대여. 
<써먹을 수 있는 방법>
1. 생어 채집. 
--1 생어채집이란?
 이외수는 생어를 중심으로 단어채집을 하라고 한다. 사어는 절망, 허무, 총명, 흉기와 같이 눈,코,입,귀,피부로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생어들은 앞에 언급한 오감을 자극하는 언어이다.

 그는 흉기로 자주 자해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   흉기 자해 - 사어
 그는 뻑하면 회칼로 자기 배를 그어대는 습관이 있었다. 회칼 배를 그어댄다 -생어-

--2 생어 채집의 예 (자기 주변으로 시작하기)
 머리 대가리 대갈통 대갈빡 골 스포츠 머리 , 백발 , 잔머리 , 돌대가리 , 이마

--3 생어채집의 예(대표 감각으로 시작하기)
 시각 코딱지 가래침 저녁놀  촉각 사포  후각 스컹크 방귀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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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1일 화요일

[펌][고종석 칼럼]노무현 생각

[고종석 칼럼 2008년 2월 21일] 노무현 생각

며칠 뒤면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난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를 지지한 사람이든 반대한 사람이든, 노무현 시대에 점수를 후히 매기는 것 같진 않다. 무엇보다, 지난해 말 대통령선거에서 구여권 후보가 겪은 참담한 패배에는 노무현에 대한 평가가 얼마쯤 반영돼 있었다.

그가 취임하기 직전, 나는 대통령 노무현의 가장 큰 업적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일 수도 있다고 쓴 적 있다. 새 대통령의 발걸음에 딴죽을 걸겠다는 악의로 한 말이 아니라, 소수파의 호민관으로서 대한민국 제1시민 자리에 다다른 정치역정을 기린 말이었다.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 처지에서 보면 아쉽게도, 노무현은 결국 대통령이 된 것 이상의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일반 시민으로 돌아올 참이다.

■ 리버럴 진영의 트로이 목마

힘 센 사람들을 향한 노 정권의 투항이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고 판단된 세 해 전, 나는 어느 글에서 노무현이 트로이목마일지도 모른다고 비아냥거린 적 있다. 복고주의자들이 리버럴리즘 진영을 무너뜨리기 위해 보낸 트로이목마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 비아냥거림을 뉘우칠 계기나 기회를 그 뒤에도 얻지 못했다.

노 정권 5년간, 서울 강남을 지역적 이데올로기적 고리로 삼은 재벌-관료 동맹은 그 전보다 더욱 튼튼해졌다. 그리고 이 신성동맹은 곧 출범할 이명박 정권에서 만세동락을 구가할 모양이다.

노무현은 힘센 친구를 새로 얻기 위해 힘없는 친구를 버렸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배신이 또렷해진 뒤에도, 그 배신으로 이득을 본 세력은 그의 친구가 돼 주지 않았다.

노 정권 덕분에 재산을 단단히 불린 땅 부자들, 집 부자들, 대자본가들은 5년 내내 노무현을 저주했다. 옛 친구를 버리고서도 새 친구를 얻지 못함으로써, 다시 말해 모두를 적으로 돌림으로써, 노무현은 기이한 방식으로 국민통합에 기여했다.

노무현이 사면초가에 놓인 이유 하나는 그의 배신이 전면적이지 못했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권력을 시장에 헌납함으로써 노무현은 과감히 경제적 강자 편을 들었으면서도, '민주화세력'이라는 자신의 상징적 기득권은 포기할 뜻이 없었다. 소위 '과거사 정리'라는 것은 역사적 정통성에 대한 이 욕망과 관련 있었을 테다.

그런데 이 '과거사 정리'는 그가 버린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삶과 별 관계없는 '정권의 취미'로 보였던 데 비해, 그가 새로 친구로 사귀고자 했던 힘센 사람들에게는 제 존재의 기반을 건드리는 민감한 문제였다.

다섯 해 전 새 대통령을 뽑을 때, 한국 유권자들 마음 속에선 윤리적 욕망이 파닥거렸다. 지난해 말 새 대통령을 뽑을 때, 그들 마음속에 윤리적 욕망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이 렇게 된 이유 가운데 큰 것이 자신의 행태였음을 노무현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탈-윤리 대통령 이명박은 윤리 대통령 노무현이 다섯 해 동안 진화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오래도록, 한국 유권자들은 정치적 결정에 윤리가 끼어드는 걸 꺼릴 것이다.

■ 윤리적 출발, 탈-윤리적 종말

공 정함을 위해서, 적대적 언론의 반노 선동이 커뮤니케이션을 왜곡해 정권을 고립시켰다는 대통령과 그 주변의 하소연에도 일리가 있었음을 지적해야겠다. 정파 신문들이 판치는 한국 저널리즘 시장에서 노무현에게 호의적인 매체는 드물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권에 대한 여론 악화를 크게 거들었다.

새 대통령 당선자나 인수위의 최근 천둥벌거숭이 행태를 노 대통령이나 그 주변사람들이 벌였다면, 정권이 뒤흔들릴 정도의 십자포화를 언론으로부터 받았을 것이다.

이것은 노무현 시대를 평가할 뒷날의 역사가가 이 시대 신문들을 사료로 쓰는 데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글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노무현과 노무현 시대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분명히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조차, 노무현이 실패한 대통령이었음은 엄연하다.

[펌][고종석 칼럼]'안티조선'의 추억

[고종석 칼럼] '안티조선'의 추억


옛날옛적에 '안티조선 운동'이라는 게 있었다.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이 김대중 정부의 정책 입안에 간여하던 정치학자 최장집씨의 사상을 검증하겠다고 소동을 벌이자, 이 신문의 행태를 보다못한 시민사회 일각에서 벌인 일종의 소비자운동이다. 정치인 노무현도 이 운동에 한 발을 걸쳤다.

사실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조선일보와 단호하게 각을 세운 것도 한 몫 했다. 냉전수구세력의 선전국과 표나게 맞섬으로써, 그는 자신을 개혁의 아우라로 치장할 수 있었다.

노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조선일보는 정권 핵심부의 '좋은 파트너'였다. 정권 주변에서 추문이 터져도, 제 구실 못해서 지지율이 곤두박질쳐도 모든 게 다 조선일보 탓이었다. 그것이 처음엔 어느 정도 먹히기도 했다. 한국 저널리즘 언어의 비속화를 선도한 신문답게, 조선일보의 정부 비판은 가히 저잣거리의 싸움질을 연상시켰으니까.

● 청와대의 조선ㆍ동아 취재거부

그러나 싸우면서 닮아가는 것인지, 노 정권 핵심부의 말대꾸도 그리 점잖지는 않았다. 게다가 조선일보 기자들이 슈퍼컴퓨터가 아닌 다음에야, 늘 틀린 말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예컨대 노 대통령의 말에 절제가 없고 사람 쓰는 방식이 비상식적이라는 건 조선일보가 지적하든 한겨레가 지적하든 옳은 말이다.

이 정권의 흐트러진 몸가짐은 자주 조선일보 기사의 사실성을 높이며 안티조선 운동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흐트러진 몸가짐이 조선일보에 대한 일종의 '계산된 보은'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한편, 정권의 조선일보 탓하기도 지침 없이 이어지고 있다. 늘 몇 걸음 뒤처져서 조선일보 따라하기에 바쁜 동아일보도 언젠가부터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지난 주에 청와대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취재를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빌미가 된 기사들이 한 인터넷 신문에 전재돼 있었는데, 읽어보고 좀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와대의 조처가 정당하다거나 부당하다는 판단을 하려는 게 아니다. 동아일보 칼럼 둘은 과연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문제삼은 조선일보 기사('계륵 대통령')는, 막말에 관한 이 신문의 오랜 명성을 생각하면, 차라리 온건했다.

지난 대선 때의 노 대통령 발언을, 경쟁자의 비열한 색깔론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라는 맥락을 거세하고 난데없이 인용한 대목에서 말의 비수가 느껴지긴 했으나, 그것은 이 신문이 어제오늘 해온 짓이 아니다. 갑자기 이 기사에 청와대가 화를 낸 것이 뜻밖이었고, 그래서 조선일보가 '부당하게 끼워 팔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노 정권과 조선일보의 티격태격에는 기이한 구석이 있다. 이라크 파병에서부터 한미 FTA 밀어붙이기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국가운영 철학'을 큰 테두리에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들의 상호 증오는 유전자에 기인한 '인종적 배타성'이거나, 시쳇말로 '적대적 상호의존'에 가까운 것 같다. 노 정권은 조선일보를 계속 탓함으로써 다 떨어진 '개혁성'을 과시하고, 조선일보는 정부를 물어뜯음으로써 알량한 '비판지'의 명성을 누린다.

● 정권·수구언론 기이한 의존관계

이렇게 이념이나 철학으로 보아 안티조선 운동을 안 해도 될 청와대 사람들은 이 운동에 열심이고, 정작 안티조선 운동을 해야 할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꿀 먹은 벙어리다. 지난 주, 출판사 창비 사이트의 '창비주간논평'이라는 방에는 백낙청씨의 '시민참여형 통일과 민간통일운동'이라는 글이 실렸다.

'시민참여형 통일'이나 '민간통일운동'에 대한 이 글의 진단과 전망이 얼마만큼 현실에 뿌리박고 있는가에 대해선 판단하고 싶지 않다. 확실한 것은, 백낙청씨가 생각하는 통일운동에 가장 적대적인 세력이 조선일보라는 점이다.

안티조선이 꼭 '운동'이 돼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때로 '태도'나 '몸가짐'으로 족하다. 백낙청씨와 창비가, 아름다운 말씀들을 늘어놓는 틈틈이, 안티조선의 '태도'나 '몸가짐'이라도 갖추었으면 좋겠다. 분열증은 미덕이 아니다.

[펌][고종석 칼럼] 인문학의 위기?

또 다시 인문학의 위기가 왔다고 한다. 잊을 만하면 되풀이되는 이 ‘인문학 위기’ 담론은 많은 논점을 생략한 채 자족적으로 선포되는 일이 예사다. 그 누락된 논점들 가운데 몇 개만 엿보자. 우선, 흔히 ‘문사철’(문학 역사학 철학)로 압축되는 인문학은 다른 분과학문들보다 내재적으로 더 가치 있는 학문인가? 6세기 한반도의 세 나라 국경을 획정하는 일이 DNA 분자구조를 해명하는 일보다 더 가치 있다고는 누구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을 테다.

인문학이라는 것의 개념과 경계도 흐릿하다. 손쉽게, 인문학을 인간 자체를 탐색하는 학문이라 정의해보자. 그럴 경우 인간의 DNA 분자구조를 해명하는 일이야말로 인문학의 일감이다. 그렇다면 다시, 인문학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탐색하는 학문이라 정의해보자. 그 경우에도, 철학이나 문학 연구보다는 뇌신경학이나 인공지능 연구 쪽이 인문학의 목표에 더 적합하다.

● 학문의 위기냐, 교수들의 위기냐

소위 자연과학의 인간 탐구 방식은 소위 인문학의 그것과 너무 달라 이를 나란히 견줄 수 없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인문학자들이 더러 경멸의 눈길을 건네는 경영학은 어떤가? 경영학의 인사관리론이야말로 인간 정신세계에 대한 섬세한 탐색의 결실이다.

인문학은 경영학 같은 응용학문이 아니라 기초학문이라고? 그 경우에, 인문학자들은 제 영역을 사회과학과 명확히 구분해야 하는 난제에 부딪친다. 이를테면 심리학처럼 인간 존재에 밀착된 기초과학은 인문학인가 사회과학인가? 하나마나한 대답이 있다. 심리학과가 문과대학(인문대학)에 속해 있으면 인문학이고 사회과학대학에 속해 있으면 사회과학이라는.

이 모든 난점을 해결해도, ‘교배’와 ‘해체’의 문제가 남는다. 18세기 한국 경제 연구는 인문학(역사학)의 일감인가 아니면 사회과학(경제학)의 일감인가? 역사학자가 연구하면 인문학이고 경제학자가 연구하면 사회과학인가? 대뜸, 접근 방법이 다르다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이를테면, 월러스틴을 빌려와, 경제학자의 18세기 경제 연구는 ‘법칙정립적’ 사회과학이고, 역사학자의 18세기 경제 연구는 ‘개성기술적’ 역사학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 둘은 실천 수준에서 늘 뚜렷이 구분되는가? 사학과 교수 김용섭의 ‘조선후기농업사연구’는 ‘개성기술적’이고, 경제학과 교수 이영훈의 ‘수량경제사로 본 조선후기’는 ‘법칙정립적’인가?

그렇게 또렷이 구분된다는 것 자체가 믿기 어렵지만,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지금 거론되는 인문학 위기는 인문대학의 위기, 인문대학 교수의 위기를 에둘러 말하는 것 같다.

한국 인문학 수준이 날로 쇠퇴해간다는 증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법과대학의 법철학자, 의과대학의 의사학자(醫史學者), 언론학과의 기호학자들은 ‘인문학 위기’를 거론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인문학 위기는 인문대학 지망생들의 감소에 따른 인문대학 교수들의 존재론적 위기인 것이다.

그런데 인문학을 살려야 한다는 주장은 서로 모순되는 논거를 동시에 취한다. 학문이 시장원리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돈벌이와 관련된 학문만 해서는 안 된다는) 명제와, 인문학이야말로 시장 친화적이라는(인문학이 제대로 돼야 돈이 벌린다는) 명제다. 최근에도 이런 모순되는 말이 한 인문학 교수 입에서 나오는 걸 듣고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논리학은 인문학이 아닌 모양이다.

● 인문학ㆍ대학은 시장을 ‘넘어’ 가라

시장이 인문학에, 정확히는 문과대학에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그런데 한국의 문과대학은 시장보다 나은가? 제대로 작동하는 시장에서라면 마땅히 해체됐을 내부의 온갖 봉건적 권력관계와 연줄 문화에 포박돼 있지 않은가? 문과대학을 포함해 한국 대학은 대체로 시장 이전에 있다.

다시 말해 시장에 미달한다. 대학이 시장 너머로 나가려면 우선 시장을 통과해야 한다. 시장은 적어도 자신의 존립 근거인 ‘합리성’으로 대학을 지금보다는 민주화할 수 있다.

[펌][고종석 칼럼]마르크스라는 유혹

‘마르크스의 거대한 귀환.’ 프랑스 시사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 최근 호의 커버스토리 제목이다. 표제가 하도 거창해서 본문에 눈길을 주었는데, 별것 아니었다. 근년의 경제 위기가 다시 마르크스 붐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 자본주의 심장부인 뉴욕 월스트리트에서까지 ‘마르크스가 옳았다’는 외침이 터져나온다는 것, 이 19세기 경제학자가 예언한 ‘자본주의 체제의 필멸’을 많은 사람이 다시 떠올리고 있다는 것. 상투적 마르크스 예찬도 고명처럼 얹혀 있다. “오늘날의 세계화 시장경제를 분석할 수 있는 최량의 지적 도구들은 마르크스의 책에 있다” “돌아와요 마르크스! 사람들이 미쳤어요!”

   

마 르크스를 향한 이런 초혼가(招魂歌)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때때로 울려 퍼질 것이다. 세계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그럴 것이고, 어렵지 않을 때라도 지식인 사회 일각에서는 무시로 그럴 것이다.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어느 프랑스인이 야유의 맥락에서 비틀었듯, “마르크스주의는 지식인의 아편”이므로. 유럽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식분자가 적잖다.
그러나 가까운 앞날에 자본주의가 사멸할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의 야만스러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크게 교정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숨쉬는 공기는 여전히 자본주의의 공기일 것이다. 시장경제라는 의미의 자본주의 말이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 예찬은 그의 이름으로 20세기의 70년간 저질러진 ‘역사의 범죄’에 눈을 감는 짓이다. 지금부터 스무 해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체제에 금이 쩍 갔을 때, 그것을 역사의 반동이라고 말할 수는 결코 없었다. 그것은 자유와 존엄을 향한 인류의 욕망이 내딛은 거대한 발걸음이었다. 일각에서 고르바초프는 제 권력 기반인 공산당을 스스로 무너뜨린 ‘바보’로 기억되지만, 그는 더 많은 사회주의가 더 많은 억압을 뜻한다는 걸 깨닫고 용기 있게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위대한 단독자다.

물 론 마르크스의 연인들은 그 이름을 때 묻은 현실사회주의와 연루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이, 더 근본적으로는 레닌이 구부러뜨리기 이전의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꿈꾼다. 그러나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역사적 사회주의에서 떼어놓으려는 시도는 덧없고 비겁하다. 우리에게 알려진 마르크스주의 체제는 유혈 낭자했던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뿐이므로. 스탈린의 사회주의, 마오쩌둥과 엔베르 호자의 사회주의, 차우셰스쿠와 폴 포트와 김일성의 사회주의 같은 것들 말이다. 지상에 건설된 마르크스주의 체제는 이 독재자들의 체제였다. 이 학살자들이 입에 달고 살았던 마르크스가 바로 역사적 마르크스, 우리가 아는 실존인물 마르크스다. 이들에게 불려나온 마르크스 말고 다른 ‘진정한’ 마르크스 같은 것은 없다. 아니 ‘진정한’ 마르크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자본주의를 지양해 이룩할 더 나은 사회에 그 이름을 갖다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체제’가 이 이름의 함의를 거의 남김없이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마르크스’라는 장신구로 치장하고 싶은 사람들

실 상 마르크스의 새 연인들도 그의 부활을 실제로 바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그저 ‘진정한 마르크스’라는 때깔 좋은 장신구로 저를 치장하고 싶은 것일 게다. 그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가장 ‘자본주의적인’ 자본가들 처지에서도 받아들일 만한 일이다. 담론은, 그것의 ‘불온함’이 근본주의에 가까워질수록, 현실과의 접촉면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니 말이다. 현실의 자본과 권력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자본주의 타도’를 요구하는 근본주의적 구호가 아니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법인세율을 조금 높이라는 요구, 서민 복지를 조금 늘리라는 요구, 노동 현장에서든 거리에서든 법정에서든 양식(良識)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연대의 움직임 같은 것이다.

용산 참사가 일어난 것이 마르크스주의 부족 때문이 아니듯, 재벌이 죄짓고도 벌받지 않는 것이, 기무사가 민간인들을 사찰하는 것이, 평화 시위가 공적 폭력에 노출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가 모자라서는 아니다. 심지어 실업자와 비정규 노동자가 늘어나고 사회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조차 마르크스주의 부족 때문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향한 한 줌의 정치적 욕망, 한 줌의 정의감, 한 줌의 시민적 양식이다.

[펌][고종석 칼럼] 정치인의 책 쓰기

<한국일보>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정치인이 문필업을 겸할 필요는 없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권력의지나 통찰력, '싸움의 기술' 같은 것이지, 문장력이 아니다. 그러나 적잖은 정치인이 책을 내고 떠들썩한 출판기념회를 연다. 대개 자기 홍보용 팸플릿에 가까운 책이다. 제 '화려한' 이력을 과장해서 기록하고 있는 그 책들을 그 '바쁜' 정치인이 직접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정치인이 제 이름으로 내는 책을 꼭 제 손끝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변사람들의 도움을 받더라도, 그 알갱이가 자신의 생각이어야 함은 엄연하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자서전들'을 들추다 보면, 이건 완전한 대필이구나 하고 짐작하게 하는 대목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진보적 자유주의의 길?

나는, 다른 전문직 종사자처럼, 정치인들도 힘닿는 한 책을 많이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 이력을 화사하게 포장한 자서전류 말고(그런 자서전류는 은퇴한 뒤에나 쓸 일이다), 제 정치적 비전과 야심을 드러내는 책 말이다. 그러나 그런 책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지식인 출신의 정치인들도, 정치판에 일단 발을 들여놓고 나면, 집필과는 담을 쌓는 것 같다.

예외 하나가 언뜻 떠오른다. 한국과 영국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고 교수생활을 하다 정계로 들어간 사람이 새 천년 들머리에 <진보적 자유주의의 길>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책을 읽은 뒤,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그 책을 학자로서 쓴 것인지 정치인으로서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텍스트의 밀도는 저자의 미끈한 교육배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을 여기저기 파헤쳐 놓은 듯한 그 책은 외적 일관성도 없었다. 그가 말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는 당시 김대중 정권의 노선과 매우 닮았는데도, 그는 김 정권에 대한 평가에 매우 인색했다. 그가 지식인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이 책을 썼다는 표지인지도 모른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를 실천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저자는 그 때나 지금이나 '진보적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기회주의적 보수주의자'다.

최근에 또 다른 정치인이 쓴 책을 읽었다. 표제는 <한국의 내일을 말하다>. 저자는 17대 총선에서 낙선했다가 네 해 만에 국회로 돌아온 3선의원이다. 그는 낙선 이후 미국에 얼마간 머무르며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지역학을 공부했는데, 그 때 이런저런 세미나에서 발표한 발제문들도 끼어 있다. 이 책 텍스트의 전부가 토씨 하나까지 저자의 손가락 끝에서 나왔다는 확신은 없다.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 이후 사정까지 다루고 있는 걸 보면, 아마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으리라.

그러나 나는 이 책의 저자가 표지에 이름이 박힌 바로 그 사람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 책을 쓰며 그가 주변에서 받은 도움이 (있었다고 해도) 그리 크지는 않았으리라는 확신이 있다는 뜻이다. 우선 이 책은 그가 정치활동을 하며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한반도와 동북아의 갈등 해소를 꾀하는 데 텍스트의 반 이상을 배당하고 있다.

나머지는 작년부터 한국인 대부분의 관심사가 된 신자유주의와 한-미 FTA에 대한 견해의 피력이다. 저자가 직업적 국제정치학자나 경제학자가 아니어서 서술이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외려 그 점이 더 미덥다. (그 꺼끌꺼끌한 문장들은 한국 법조인들의 악명 높은 글 솜씨를 연상시킨다. 이 책의 저자는 법조인 출신이다).

한국 리버럴리즘의 최대치

참여정부 다섯 해를 거치면서, 이 책 저자와 가까운 정파에 대해 나는 지지를 철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의 논지엔 대체로 수긍이 간다. 그것은 한국의 '리버럴한' 정치인이 지닐 수 있는 전망의 최대치를 드러내고 있다. 궁리와 공부를 통해 책으로 자신의 비전을 널리 털어놓는 관습이 다른 정치인들에게도 퍼졌으면 좋겠다.
[출처] [고종석 칼럼] 정치인의 책 쓰기|작성자 추미애팬

2009년 11월 3일 화요일

정부 부처 예산 시뮬레이션 서비스

 정부에서 어떤 예산이 얼마 나왔으면 그것으로 어떻게 살림을 잘 꾸려나갈수 있는지 공모전같은 것을 해보았으면 좋겠다. 구청같은 곳에서 서비스로 시민들에게 우리 구는 돈이 얼마 나왔으니 한번 이것으로 어떻게 살림을 꾸릴지 가상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세부적이게는 할 수 없겠으나 사람들에게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으로서는 유용할 것같기도 하다.  대학생 공모전 형식으로 한다면 젊은 사람들에게 많은 호응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정책 마켓은 안될까?


 이원재님의 블로그 글 중 정책을 마켓에서 물건 고르듯이 고르면 어떨까 라는 부분을 보고 생각난 것인데 정책들을 지마켓에서 물건 고르듯 손쉽게 고를 수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바구니 같은 것도 만들어서 자기에게 맞는 정책을 이것저것 골라서 집어넣는 것이다. 적어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투표권을 행사한다면 극우정당을 통해 한번도 기득권을 누려본적없는(지역적 가상의 기득권을 체험하셨을지도) 서민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회가 변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울러 정치의 무관심(하다고 알려져있는)한 20대의 흥미를 끌 수도 있을 것같다. 각 연구소같은데서도 정책을 신제품처럼 내놓으면 그거에 관련해서 사람들의 호응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2009년 9월 4일 금요일

세상을 이해해야 겠다.

 얼마전 과 부조교를 하면서의 일이다. 교수님의 부름을 받고 어떤 심부름을 받았었는데, 그것을 임의대로 생각하다가 실수를 했다. 조금 성질이 급하신 분이라 이때문에 화가 좀 나셨는지, 계속 이런 저런 요구를 덧붙이셨는데, 이에 고까운 마음이 들어서 일부러 더 늦게 가져다 드렸다. 일이 끝나고 교수님이 한소리  하셨는데, 앞에선 '예 알겠습니다.' 하면서도 , 속으론 원망의 마음이 일었다.
 시키신 일을 마무리 지으러 먼 학교 건물로 가는 길에 화가 나서 씩씩댔으나, 올라오는 길에는 또 이러는 스스로에 대해 반성을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젊은 시기에 쓴소리 해주는 사람은 고마워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왜 스스로의 실수때문에 일어난 일을 누구에게 원망하는 것인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스스로 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를 못하고 자꾸 자기 생각대로 쳐다보니 이리 못나게 사는 것일테다.
 사소한 일이지만 이 일을 겪으며 많은 것을 느꼈다. 또 이런 실수를 하고 투덜거리기만 하거나, 반성을 하면서도 고칠 줄을 모른다면 나란 사람의 크기는 딱 거기까지일 것이다.














2009년 8월 18일 화요일

이성으로 비관하고 정열로서 낙관하라.

 이성으로 비관하고 정열로서 낙관하라.-홍세화-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가슴에는 불가능한 꿈을 꾸자. - 체게바라-
 
나는 더욱더 영리해지고 싶다. 나의 뱀처럼 철저히 영리하고 싶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나는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불가능을 바라는 나의 긍지가 항시 영리하게 실천되기를 나는 바란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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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외에도 현실과 꿈에 두가지에 대한 문구는 꽤 많다. 그만큼 현실의 냉혹함에 빠져 그냥그냥 하루를 지내면 삶이 비루해지고, 그렇다고 꿈의 달콤함에 빠져 현실을 등한시하면 그야말로 바보가 되고, 둘 다 별로 삶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놈의 중심 그놈의 중용이 대체 무엇일런지. 현실과 이상의 가운데 줄타기 . 난 떨어지지 않고 잘 타다 인생을 마칠 수 있을까?

모든 게임에서 이기는 룰이 있다. 룰을 자기가 만드는 것이다.

모든 게임에서 이기는 룰이 있다. 룰을 자기가 만드는 것이다.
                                                                   - 백남준-


 

 잠시만요 남준이 형님. 그것 참 너무 어려운 일 아닌가요? 내가 자라오고 보아온 환경, 고정관념이 룰 아니었던가요? 점점 나이들어가면서 상상하는 룰의 범위도 좁아지는 것 아시나요? 혹시 모든 사람은 그 사람들 수만큼의 룰을 자기도 모르는채 만들고 살아가는 것 아닌가요? 자기가 룰을 만들면 좀 행복해지셨던 가요?  좀 대답해주시면 안되나요?

2009년 8월 14일 금요일

초식남?

한겨레 기사를 읽다보니 요즘 초식남이 뜨는가보다. 연애에 관심이 없고 자기 소비에 치중하고 생활을 가꾸어가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그 정의를 듣고서 이들을 어떻게 봐야할까 혼란스러워졌다. 내 주위에 철벽녀는 몇 봤어도 남자들은 다 사랑을 갈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더 이해하기 힘든지 모르겠다.

매트로 색슈얼이 뜰 때만해도 그들은 내게 문화적 현상으로서 이해되었다. 사회에서 마초들이 희화화되고(KKK단이 사라져가는건 그들을 억압해서가 아니라 영화등의 매체에서 그들이 비웃음을 사기때문이다.)화장품회사등에서 남성들을 마케팅 타겟으로 삼으면서 그들은 외모에 신경쓰는 새로운 소비주체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문화적인 흐름을 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래도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기위한 마음은 사라지지않았었다고 본다. 오히려 이성의 마음을 사로 잡기위해서 그런 트랜드에 편승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초식남들은 이성에 대한 욕망 감정을 소비 혹은 취미등에다가 투영하고 거기서 멈추는 경우인데, 뭐랄까. 이들은 성욕같은 근원적인 것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물질욕과 성취같은 피상적인 것에 적을 두는 사람들로 보인다 . 프로이트는 초자아가 이드를 너무 억압하면 문제가 생긴다고 했는데 그들을 억압하는 초자아는 대체 무엇일까? 그들은 자기 외모와 소비자체에 욕구가 고정되어 있는 것일까?

피카소가 6명의 여인과 평생 연애하면서 산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6명 맞나?) 그런 연애경험이 피카소에게 기발한 창조적 상상력을 주었을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조지부시같은 사람들은 그 정반대에 서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차라리 여자좋아한 클린턴시절 세상이 그나마 조용했던 반면 조지부시때는 미사일이 날아다녔다. 그는 성욕을 성취와 권력욕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인물같은 느낌이 든다.(명박이형도. 명박이형은 사랑해봤을까?)

쇼펜하우어는 잠언록에서 건강과 같은 근원적인 것을 추구하라고 한다. 또 행복하기보다 고통을 피하라고도 한다. 초식남들은 어느 경우일까? 내게 그들은 고통을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자기가 행복하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냐만은 )연애, 사랑이 전 우주적 가치도 아니고 사랑이 근원적인지는 확실하게 이야기 못하겠으나 온갖 문학작품들 , 영화들 , 노래들이 그것을 위해서 나오는 것을 보면 그들의 나르시시즘, 취미, 물질욕보다는 한참 위에 있는 것 아닐까? 주변에는 울고있는 늑대들만 있어서 그런지 이런 추세가 신기하게 느껴진다.

2009년 8월 13일 목요일

실버잡지가 없는 이유

  요즘 잡지기자란 직업에 좀 관심이 가서, 이것 저것 알아보다가 노인을 위한 잡지가 있나 해서 검색창에 쳐 보았다. 노인들을 위한 기획이라면 나름 컨덴츠도 풍부하고 노령화 사회로 들어가는 지금이라면 독자도 꽤 풍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인잡지 ,실버잡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왜 일까 궁금했는데 어느 사이트에서 어렴풋한 답을 얻을 수가 있었다. 자식에게 모든것을 물려주고 노후를 자식에게 의존하는 한국에서 노인층의 시장경제란 만들어지기어려워서 그들에게 실 구매력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여기서 또다시 꺠달은 것은 경제든 문화든 정치든 뭐든 다 얽히고 섥혀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다. 그들의 구매가 적은 이유는 우리나라의 인습이란 사회문화적 요인에 기인한다. 요즘들어 아기용품 시장이 크고 있는데 이 이유도 따지고 보면 자기는 안입어도 자식에게는 좋은 거 입히려는 관습으로 인한 것일테다. 그런가 하면  비싼 요트시장도 있는데 점점 양극화로 흘러가게 하는 정치시스템이 이런 수요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문화적,정치적,경제적 요인을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진 사람이 새로운 아이템으로 시장에 승부할 수 있을 것같다. 예전 같이 일하던 형의 고모란 분이 상당히 사업을 크게 한 사람이었는데, 그 분이 중국을 다녀와서 그형에게 한 말이 중국엔 배달문화가 없다고 거기서 배달 사업을 하면 돈을 많이 벌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그 분 명언 : 돈은 은행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지금 중국엔 BBQ가 진출해 승승장구하고 있다.
 물론 나는 사업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하지만 내가 나중에 PD나 혹은 기자가 되어 무언가를 기획한다는 것도 결국은 시청자, 독자라는 수요를 이끌어내야한다. 그것은 사업과 마찬가지로 너무 앞서가도 안되고 너무 뒤쳐져도 안된다. 그것은 도태를 불러올 것이다.
 불안의 시대, 그리고 가장 불안한 떄를 걷는 지금 나에게는 새로운 계획과 기획이 필요하다. 좋은 계획과 기획을 하려면 지금 살고 있는 지금의 시대를 잘 읽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 불안의 지금이 그만큼 스스로를 민감하게 해 새로운 것을 보는 눈을 길러주었으면 좋겠다.

2009년 8월 12일 수요일

시장 산책

 요즘 가끔씩 시장을 한바퀴 돌곤 한다. 조금만 걸으면 청계천길이 있지만 낮에는 차때문에 너무 시끄럽다. 시장을 걷다보면 여러 소리들이 들리고 여러 냄새들이 나며 여러 표정들이 있다. 이런 저런 사람들이
여러가지 물건들을 팔고 있다. 그 여러 물건만큼이나 여러 삶들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시장을 걸으며 느낀다.
 그러다 든 의문 하나. 여기 있는 사람들이 파는 물건에 이 사람들의 삶이 걸려있을텐데, 난 과연 무엇을 팔 수 있단 말인가. 국수집 아주머니는 맛있는 국수를 하루종일 팔아서 삶을 산다. 양말가게 아저씨는 양말을 팔아서 삶을 살아간다. 과일가게 아줌마는 과일을 팔고 시장에 물건을 배달하는 사람들은 배달을 해서 하루를 살아간다. 못생긴 번데기같은 나는 도무지 내 무엇을 팔 수 있을지 감이 서지 않는다. 잉여인간같은 하루속에  불안을 조금 덜어내보고자, JPT 책을 펼치고 토익책을 펼칠 뿐이다.
 하지만 그 불안과 의문속에 나를 던져두는 일은 더이상 하지 않는다. 뭔가 다이나믹한 시장의 분위기, 그 성실함을 배워 하루 하루 준비의 날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고단한 삶속에 자기의 삶을 성실히꾸려가는 사람들. 요즈음 하루 하루 시장을 산책하며 시장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
 

변화.

 점점 세상을 이해하게 되는 것같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보수적으로 변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의문은 사라지지않는 것같다. 그런의미에서 난 진보적인지 모르겠다. 

2009년 7월 31일 금요일

하나의 생명을 구하는 자는 세상을 구하는 것.

 하나의 생명을 구하는 자는 세상을 구하는 것.  -탈무드- 쉰들러 리스트에서

  유태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돈을 들여 유태인들을 사들인 쉰들러. 그 쉰들러가 떠나는 밤 공장의 사람들은 그에게 저 글귀가 있는 반지를 선물한다. 쉰들러는 더 살릴 수 있었을 거라며 눈물을 흘린다. 이 차면 열사람을 살리고 이 핀으로 두사람을 살렸을 거라고 오열한다. 오열하는 그를 유태인들은 다가가 감싸안는다.
 하나의 생명을 구하는 것 혹은 하나의 생명에게 희망이 되어주는 것. 그것은 도대체 얼마나 큰 사랑이며 자비일까. 시인의 말처럼 난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을런지...  오늘 한 가슴 뜨거운 분의 글을 보며 자기 살기 급급한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내 멋대로 도덕경 No.4

12장

다섯 가지 색깔로 사람의 눈이 멀게 되고,
다섯 가지 음으로 사람의 귀가 멀게 되고,
다섯 가지 맛으로 사람의 입맛이 고약해집니다.

말달리기,사냥하기로 사람의 마음이 광분하고,
얻기 어려운 재물로 사람의 행동이 그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배(腹)를 위하고 눈을 위하지 않습니다.
후자는 뒤로하고 전자를 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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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한창 연예인 대마초 사건이며 , 클럽의 퇴폐 향락 문화로 나라가 시끌시끌하다. 모든 쾌락에는 번뇌가 따라다니기 마련인데 더 큰 쾌락을 자꾸 찾으니 그 번뇌와 고통도 그만큼 커진다. 이 장에서는 그런 쾌락에 대한 경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사람을 광분하게 만드는 쾌락들, 시대적으로 보면 까마득히 떨어져있는 노자의 시대때도 그런 쾌락은 존재했었나보다. 그런 쾌락에 대해 도덕경에서는 배(腹 배 복)를 위하라고 조언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눈을 위한 말초적인 쾌락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향하라는 말이다. 점점 도를 지나치는 쾌락이 만연하는 때라서 그런지 이 장의 말씀이 더 깊이 다가온다.

2009년 7월 8일 수요일

하늘색 꿈 - 고 장자연씨를 추모하며-

 공부하다 갑자기 머리속에 떠올라서 5시부터 대략적인 콘티를 생각해보고 여기저기서 이미지를 무단 다운. 노래에 붙여서 10시에 완성. 출처를 처음엔 쓰다가 싸이트가 너무 많아 도저히 다 달수가 없었다. 그러나 두번째 나오는 그림 영상은 출처를 밝혀둔다. 지금 올려놓고 허락 메일을 보낸 까닭에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오늘 하늘색꿈만 수십번  돌연변이(드렁큰 타이거) We will rock you(퀸)도 수십번 들었던 것같다.  
 그럼 자그만 추모 영상을 올리며  삼가 고인의 명복의 빕니다.


두번째 영상 출처
http://blog.naver.com/tignk12?Redirect=Log&logNo=130044016402

불안의 정체

 요 며칠간 알 수 없는 불안감 속에 어쩔 줄 몰랐다. 어쩔 줄 몰랐다고 해도 무슨 특이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갔을 뿐이다. 하지만 몸에 흐르는 이 불안 속에서 무엇하나 몰입하기도 힘들었고, 모든 일에 확신이 사라져갔다.  
 그러던 중 다시금 계획이나 짜봐야겠다 싶어 공책을 들고 앞으로의 계획을 짰다. 한 6개월 정도로 잡아놓고 돈과 걸리는 시간등에 대해 이리저리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그러다 어느 한 곳에 이르러서 잠시 잊었던 그 불안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 직업과 삶의 방향에 대한 것이었다.            
 왜 나는 이 대목에서 상당한 불안감과 마주했을까 궁금했다. 알바를 구하고 학자금 이자 얼마내고 하는 한달의 지출을 정하고 할 때는 전혀 느끼지 않았던 이 불안감. 그 불안감을 곰곰히 생각해보던 중에 나는 이 불안이 내 얼마나 황당한 바램속에 있었던 것인가 깨닫게 되었다.  
 예를 들어보자, 알바를 구하고 한달 얼마 쓰겠다는 것은 내 계획의 영역이다. 그조차도 알고보면 많은 불확실성에 휩쌓여있는 것이지만 적어도 그 불확실성은 내가 감당할 만 한 수준이다. 그러나 내 삶의 방향과 내 꿈에 이르러서는 그 불확실성이 상상이상으로 불어난다. 결국 내 불안이란 그 불확실성을 감당하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었는데 이게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소리란 말인가.
 이 인정투쟁의 장인 세상속에서 과연 내가 가치의 투쟁에서 이길지 질지 어떻게 알수 있을까. 내 인생의 방향을 내가 어떻게 지레짐작할 수 있단 말인가. 또 그 과정조차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그 결과를 못본다고 불안해한다는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나는 황당하게도 내 삶의 모든 일들을 보지 못해서 불안해하고 있었다. 사실 그 모습들을 다 본다면 여태까지 겪은 불안의 곱절만큼 권태에 휩쌓일지 모르고 난 도저히 살 수 없을지 모른다.  
 
 난 뽑기(방향)를 정하고 뽑기에 동전(노력)을 넣을 수는 있다. 그러나 뽑기에서 뭐가 나올지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신이란 변덕쟁이의 영역이다. 난 동전이나 열심히 넣어봐야겠다. 무엇이 나올까 걱정하기 보다는 무엇이 나올까 설레이는게 좋을지 모르겠다.

 잡담: 저와 같은 불안에 떠는 분들을 위해 한 영화감독의 좌우명(샘터에서 봤던가 가물)을 올려놓습니다.                      

 아님말구

2009년 7월 4일 토요일

손에 손잡고(Hand in hand) - 코리아나


 냉전, 산발적인 전쟁들, 무차별적 성장에 따른 지구의 황폐화.  

그 때 나오는 하나의 외침,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연대와 화해, 지속가능한 성장. 어쩌면 모든 답을 제시한지 모른 노래.

진정 저런 축제와 같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2009년 7월 2일 목요일

불꽃남자 동욱이형을 기억하며


  동욱이형을 처음 봤던 때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 같은 소대도 아니었고, 워낙 찌글찌글(계급이 낮다는 표현)할 때라서 옆 소대 후임따위는 신경쓸 겨를도 없었으니까. 그때는 나 하나 건사하는데 정신이 없는 때였다.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면 먼저 필승하길래 아 내 후임이구나 하고 알아차린 정도, 같은 소대가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이 될 때까지 관심도 안 가졌었다.   
 하지만 복도에서 필승을 외치는 동욱이형은 묘한 분위기의 사람이었다. 모든 걸 받아줄 것 같은 푸근하고 선량한 눈, 약간 이국적인 얼굴 , 큰 키  목소리는 그다지 힘이 없었지만 부드러웠다. 왜 그런가 하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는데 고참들이 중대 본부 애들 이야기를 듣고 와서 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군대를 1학년 혹은 2학년 중간에 가지만 나는 학보사 활동때문에 23살에야 군대를 입대했다. 선임중에도 22살짜리 애들이 즐비했고 병장들이 나랑 나이가 비슷하곤 했다. 그런데 동욱이형은 나보다 두 살 많은 25살이었다. 왜 그렇게 나이가 많은 가 했더니 대학을 두번 들어가서 라고 했다.   
 동욱이형은 원래 서울대 공대에 다니고 있었다 . 그러다가 신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광주에 있는 신학대학으로 다시 입학하고 학년을 다닌 후 군대에 온 것이었다.  
 최전방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소위 SKY 대학에 나온 아이들은 일반 보병중대에 떨어지지 않고 본부중대 보직을 받는다. 우리 중대에서 가장 학벌이 좋았던 아이는 한양대 다니는 내 동기였다. 생각해보면 그 형이 공대를 계속 다니고 있었다면 이 빡센 보병중대에 올 일은 애시당초 없었다.     
 후에 내 머리가 만들어낸 이미지인지 모르지만 가물가물하게 훈련때 형의 모습을 본 적도 있는 것같다. 정말 가파른 대성산 길들, 철원의 살인적인 더위. 안경 속 땀방울과 함께 헉헉 거렸던 걸로 기억한다. 뭐 훈련 때 뿐일까. 같은 중대니 진지공사며 이런저런 때도 많이 스쳤을 것이다. 그러다가 좀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은 지뢰에 철심까는 작업때였다.  
 그때 무슨 협정이 바뀌었다고 지뢰도 지뢰탐지기에 걸리게 철심을 하나씩 넣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세계에서 지뢰때문에 목숨을 잃는 아이들이 상당하다고 한다. 탄약 반장이 데리고 다니는 작업은 정말 모하니면 도였는데 정말 땡보(무진장 편하다는 표현)일 때도 있는가 하면 무진장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그때는 시간은 좀 걸렸지만 설렁 설렁하는 작업이라 동욱이형이랑 대화할 시간이 좀 있었다.                   
 사실 그때 거창한 이야기 없이 그냥 종교에 대해 이리저리 이야기했던 것같다. (왜 사람의 기억은 대부분이 뿌연 이미지일까 답답하다.) 아는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 밖에 없어서 그런 것도 공부하고 그러냐고 물으니 자기 학년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했던 걸로 기억한다. 군대에서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났지만 , 동욱이형도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뭔가 신념에 꽉찬 사람. 그러면서 부드러운 사람이랄까?           
 그런 시작과 중간을 보내고 근무지 변경으로 소대가 갈린 뒤 한참 못 보다가 다시 만난 것은 GOP에서 였다. 1소대와 2소대는 바로 옆에 건물을 쓰는 까닭에 밥 먹을 때도 보고 얼굴 볼 일이 많았다.  동욱이형과의 시작과 중간은 가물가물하지만 끝은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 후의 일때문에 형이 나에게 큰 의미가 되서인지는 모른다.
 GOP는  두 소대가 붙어있지만 쓰레기 처리하는 곳은 한 곳이다. 그런데 우리 소대에 비해서 2소대 아이들이 분리수거를 안한다고 불만이 컸다. 그것 때문에 이야기를 하러 갔었는데 그 때 동욱이형이 있었다. 형에게 소대 쓰레기좀 잘 처리하라고 볼멘소리를 했었는데 후임들 앞이라 좀 그랬을 텐데도 불구하고 이제부터 잘 하겠다고 했다. (당연한 것같지만 원래 후임들 많은 곳에서 대놓고 혼내면 안된다. 자존심을 뭉개는 행위다.) 형은 화를 내는 경우가 없었다. 그리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깨끗이 인정했다. 그리고 그 후 형을 보지 못했다.
 군대에서 대부분 작업을 할 때 휴식시간이 되면 그냥 땅바닥에 주저앉곤 한다. 하지만 그 곳에 쥐똥이나 온갖 더러운 것이 많다. 특히 쥐똥같은 것이 있으면 유행성 출혈열이 걸릴 수 있는데 치사율이 40프로가 넘는다.
 상황실에서 (본부 소대라 GOP에서는 상황실에서 근무한다.) 휴가를 나간 동욱이형이 많이 아프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 많이 아프다는게 얼마나 아픈지 몰랐다. 뚱보 중대장의 굳은 표정에서 좀 심각성을 느낄 수 있었을 뿐. 하지만 이틀날 누구도 직접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조용히 형의 소식은 전 중대에 퍼졌다. 항상 야간근무 잡담으로 하루 하루를 때우던 그 때, 그 날은 아이들 다 말이 없었다. 나는 그냥 공책을 피고 기억안 날 말들을 끄적이며 아침을 맞았다.           
  가까이 생활하던 사람의 죽음을 별로 본 적이 없던 나는 혼란스러웠다, 신은 무엇일까? 신의 뜻은 무엇일까? 신은 동욱이형이 믿던 성경에서 처럼 도덕적인 존재일까? 과연  인간의 도덕과 신의 도덕은 상관이 있는 것일까? 동욱이형을 데려가는 것. 그것은 단지 불편부당한 것인가?   신은 정말 미울정도로 철저히 가치중립적인 것은 아닐까? 왜 대대 연대 사단에서 가장 순수한 영혼을 데려갈까? 그것이 신의 뜻일까?        
 형의 선택은 옳은 것이었을까? 결과로 봐야는 걸까? 과정으로 봐야는 걸까? 신부는 슬퍼하며 동욱이형은 천국에서 영생의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할까?   형이 서울대 공대생으로 남아있었다면 과연 죽었을까? 형은 행복했을까? 형이 사라진 지금 형의 행복을 말 할 수 있는 걸까? 불교신자이지만 좋은 업만 쌓아온 형이 윤회의 법칙속에 가야하는 이유는 또 뭘까.
 
 그 무엇도 답 할 수 없었다.

형의 죽음도 어느새 흩어져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얼마 후 나는 제대했다. 생각해보면 형도 군생활 2개월 정도 남은 무렵의 일이었다.
 이 밤 밑도 끝도 없이 형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때의 질문도 떠올랐다. 어차피 다 답은 못했지만...
갑자기 쥐가 생각나서 그런지 누구 생일날이어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다.흠.                                        
이 순간 말할 수 있는 건 형은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 그정도? 흠.
 
어! 쩄! 든!


   스물 여섯의 김동욱은 불꽃남자였다!
   형을 잊지 않겠어!  

          

내 멋대로 도덕경 No.3

11장

서른 개 바퀴살이 한 군데로 모여 바퀴통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無)때문에
수레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그릇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방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있음은 이로움을 위한 것이지만
없음은 쓸모가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

 수레의바퀴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중간 중간의 비어있음 때문이다. 그릇을 쓸 수 있는 것은 가운데가 비어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물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다. 사람도 뭔가 비어있지 않고는 채울 수도 없고 쓸모를 잘 알 수도 없다.
 하지만 작금의 세태는 그 없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학생은 끊임없이 점수, 지식 ,스펙을 채워내야하지만 정작 그 비어있음에서의 성찰이 없는 결과 , 그들은 그들의 쓸모를 잘 모른다. 멋도 모르고 과를 고르고 대부분 멋도 모르고 취직을 한 끝에 나이 서른되서도 자기가 왜 이걸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회사원들은 누구 말마따라 방전없이 충전만을 하며 동물의 왕국 속에 살아가고 삶을 그렇게 채우면서 ‘살아내야’하지만  그렇게 채우고 채워도 그들은 스스로 만족하기 힘들다. 그들이 평생 쫓는 것은 돈과 성취뿐이다. 이건 나이가 들어도 바뀌지 않는데 그 끝없는 채움 후에 삶을 관조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에게 이 사회는 새로운 시작을 요구한다. 마지막까지도 그들에게 이로움만을 위해 살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살게 하는 , 진정 쓸모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만해도 나를 살게하는 것은 하루 꽉 차있는(요즘들어 좀 게을리했지만;;;;) 영어, 일본어 공부가 아니다. 그 사이의 독서, 사람들과의 수다와 웃음, 그리고 멍하니 생각하는 시간들이다. 그 시간들속에서 자신이 쓸모있게 살 수 있는 방향을 생각할 수 있고 이로움을 위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으며 창조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없음은 쓸모가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모두들 없음과 비어있음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가져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정작 자신의 쓸모를 알고 싶다면...................


 휴식이 없음은 노예의 특성이다. 동시에 그들을 규정짓는 말이기도 하다.
 -책 희망의 인문학 중 재인용. 누구말인지도 저 글이 맞는지도 잘 기억이;;;; -
 

2009년 7월 1일 수요일

내 멋대로 도덕경 No.2

 



제 49장

성인에겐 고정된 마음이 없습니다.
백성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습니다.

선한 사람에게 나도 선으로 대하지만
선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선으로 대합니다.
그리하여 선이 이루어집니다.
신의 있는 사람에게 나도 신의로 대하지만
신의 없는 사람에게도 신의로 대합니다.
그리하여 신의가 이루어집니다.

성인은 세상에 임할 때 모든 것을 포용하고
그의 마음에는 일체의 분별심이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 이목을 집중하여 분별심을 일으키는데]
성인은 그들을 모두 아이처럼 되게 합니다.

--------------------------------------------------------------------------  
 처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성철스님의 말이 나올때만 해도 김성모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야 라고 생각했었는데, 고정된 마음을 버리고 미발의 상태로 돌아가는 도를 이야기 한것이었다니..(꿈보다 해몽일까)

내멋대로 도덕경 no. 1

 내 멋대로 도덕경 no.1

제 63장  


함이 없는 함을 실천하고
일함이 없는 일을 실행하고,
맛없는 맛을 맛보십시오.
큰 것을 작은 것으로 여기고
많은 것을 적은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원한을 덕으로 갚으십시오.

어려운 일을 하려면 그것이 쉬울 때 해야 하고,
큰 일을 하려면 그것이 작을 때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도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되고,
세상에서 제일 큰 일도 반드시 작은 일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끝에 가서 큰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큰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무릇 가볍게 수락하는 사람은 믿음성이 없는 법이고,
너무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어려운 일을 맞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이라도 일을 어려운 것으로 여기는 법입니다.
그러기때문에 끝에 가서 어려운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
 작은 것을 작게 여기고 큰 것을 크게 여기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당연한 일이다. 하루의 작은 일들은 작게 생각되고 뭔가 나중에 자신이 이룰 일들은 크게  보인다. 하지만 하루의 작은 순간순간들이 모여 그 큰일을 이루는 것은 잘 모른다.
 ‘큰 것을 작은 것으로 여기고 많은 것을 적은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라는 것은 그래서 의미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금 이 큰 순간이 만들어낸 작은 결과과 자신이 이루는 일이 아닐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도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되고’라는 구절도 백번 옳은 말임에 틀림없다. 이 구절에서 나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롤모델로 생각할 때를 떠올렸는데, 만약 박진영씨를 롤모델로 생각한다고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명성과 파워를  보며 그 어려운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성공의 모델로 나오는 사람들은 이미 완제품처럼 나와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정작 봐야할 것은 그 사람이 작은 쉬운 일들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작은 일들이기 때문이다.
  너무 쉽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겁을 먹으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생각의 가벼움과 현실의 신중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는 작은 일의 순간순간을 어렵게 여겨 큰 일의 이루어짐을 쉽게 하라는 이야기로 읽힌다.

조선일보와 함께보는 장자연 사건

예전에 같이 영자신문 다니던 놈이 조선일보 다니는 어느 여기자를 만난 일이 있다.(왜 만났는지는 모름) 그 떄 그 여기자분은  "조선일보 기자면 뿔 달린 줄 알았죠? "라고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그냥  놀리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대학 신문들에게 비춰진 자신들의 모습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겐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혹시 사회에 비춰진 자신들의 모습도 대충은 자각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순진한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 때 그 분은 그냥 놀리신게 분명한 듯 싶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좀 의식한다면 대체 이런 행보를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
법원·검찰·경찰

경찰 중간발표 "조선일보 특정 임원 장자연 사건 무관…모든 사안 관련성 없어 무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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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조선 닷컴 홈페이지를 들어가보니 대문짝 하게 기사가 펼쳐져 있었다. 그동안 혐의속에 묶여있던 조선일보사로서는 정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한겨레 독자나 한토마 들어오시는 분들은 곧이 곧대로 믿으시는 분은 별로 없으실 것이다. 세상 뭐 그렇지 힘있고 봐야지  ㅆㅂ 정도 내 뱉으실 듯 싶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일보 구독자도 수사결과를 별로 안 믿을거같다는 것이다,

사회
종합

"당시 성(性)상납 수사때 엄청난 외압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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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4.16 02:39 / 수정 : 2009.04.16 09:4

 
조선일보 4월 16일
 처음엔 한겨레가 쓴 기사인줄 알았다. 자기 언론사 대표가 혐의를 받고 있는 마당에  2002 년 성 상납 수사시 엄청난 외압이 있었다는 걸 보도한다는 건, 검찰의 안일한 수사태도를 압박하는 것일까? 아니면 저번에도 저렇게 대충끝났으니 이번에도 대충 끝날 것이다 라는 암시일까? 왠지 조선일보의 그동안의 행태로 봐선 두번째가 사리에 맞지만 만약 아니라면 이 달의 기자상은 한현우 기자님께!
 그러나 문제는 의혹 덕지 덕지 붙은 중간 수사 발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분들은 며칠전 이종걸 이종희 의원을 고소했기 때문,  그렇게 폭넣게 이리저리 욕(그러니까 비판)을 하시는 분들이 그 폭만큼의 비판을 받아들으시지 못하는 것도 쪼잔해 보이지만 기막힌 것은 이분들이 하시는 소리들이다.
정치
종합

본사(本社), 이종걸·이정희 의원 등 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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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사는 고소장에서 "본사 임원은 장씨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는데도 이종걸 의원은 지난 6일 국회 대정부 질문을 통해 '장자연 리스트' 내용을 언급하면서 본사 특정 임원이 장씨 사건에 관련된 것처럼 이야기해 본사와 본사 특정 임원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밝혔다.-본문 내용 중-
 
 여기서 조선일보는 "전혀 관련이 없는데도"라고 했다.

강희락 "장자연 리스트에 <조선>간부 들어있다"

"리스트 중 6명은 모처에서 조사…3명은 접촉 중"

기사입력 2009-04-13 오후 4:3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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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4월 13일자
 
 정말 진중권 교수 말마따라 장자연씨가 안티 조선 하려고 목숨을 끊으신 것은 아닐텐데, 리스트에 버젓히 올라가 있는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관련없다고 하시며 명예훼손을 청구하신다. 이분들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가해자의 행태로 봐서는 당연히 조용히 있으실줄 알았지만 이들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태도가 돌변하셨다.
 김대중 고문은 칼럼에서 "조선일보의 입장에서 보면 경찰도, 어떤 의미에서는 정권도 이 '장자연 사건'의 진행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당국의 무능과 무력, 또는 관음증(?)이 사태의 '주연' 같고, 일부 '안티 조선'의 조바심이 '조연'처럼 보였다." 라고 하셨다.
  피해 망상도 이정도 되면 병일 듯한데 우스운 것은 관음증(?) 이란 대목이다. 조선일보는 얼마전에 연쇄 살인범 강호순 사건에서 화끈하게 사회적 관음증의 해소에 일조하지 않으셨나? 역시 내가 하면 스캔들이고 남이 하면 로맨스인 것일까? 같은 알 권리 라지만 내가 생각하는 알 권리와 조선일보가 생각하는 알 권리는 다른 듯 싶다. 정확히 말하자면 맞았다 달랐다 하는 것일테다. 명예훼손 운운하기 전에 자기들 행태나 다시 뒤돌아봐야하지않을까?
요즘 들어 아는게 병이라는 사실을 곱씹어보게 된다. 다들 "그럴껄" 하던 사실이 요즘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펼쳐진다.'경찰 청장은 룸 안가냐 다 저것도 큰 놈들오면 접대할걸 '다 로비질 하는거아냐 신인애들 팔고, 아마 그럴걸'  '저거 앵커 가만 둘거같냐 자를걸' 순대국밥집에서의 아저씨들의 호언장담 이야기들 혹은 커피숍에서 여자애들 사이에 도는 출처가 꼭 있는 연예계 뒷이이야기들.  분명 다들 그럴걸 하고 공공연하게 아는 사실인데도 막상 사실을 알면 빈 속에 커피 넣는것 마냥 씁쓸하다.
 개인적으로 조선일보 임원이 이 사건에 무관했으면 한다. 그래야 사실 뿔은 안 달렸구나 하고 믿을 테니까. 하지만 문건에 나온대로 정말로 그랬으면......................

asdasdsa.jpg

죽는다 진짜.



예전 한토마에 올렸던 글인데 김대표란 놈이 잡혀와서 블로그에도  올려본다. 강희락 경찰청장처럼 기자들에게 모텔키 쥐어준 경험이 있으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돈으로 창녀촌 드나들어본 경험이 있으면 이해 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사회 분위기 자체가 좀 역겹다.

2009년 6월 30일 화요일

[감상문]희망의 인문학을 읽고


 희망의 인문학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를 읽고,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를 만났을 때의 이야기이다. 천하를 다스리는 대왕이었던 알렉산더는 행색이 거지꼴인 디오게네스에게 필요한 것을 말하면 들어주겠다고 한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그럼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고 하고, 이에 알렉산더는 감탄하며 자기가 알렉산더가 아니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한다. 여기서 디오게네스는 빈자가 아니라 대왕도 부러워할 만한 부를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여기 록펠러처럼 당신을 부유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사람이 있다. 요즘 TV 신문, 책에 판을 치는 얼치기 희망 약장수일까? 그는 계속 말한다. “ 아니 어쩌면 여러분은 록펠러보다 더 큰 부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록펠러 집안 사람들이라 해서 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아닐테니까요. 앞으로 인문학을 공부하면 여러분은 ‘부’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며, 여러분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이 황당한 공상가의 말은 곧이 믿을 만한 것일까? 그러나 그 곳에서 하나의 기적이 시작된다.  
 이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접하게 된 건 1년전 쯤이다 월간 샘터 기획 코너중 하나에 노숙자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성 프란시스 대학의 사연이 실렸는데, 이 이야기를 본 나는 적잖은 충격에 휩쌓였다. 가장 빈곤한 사람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당연히 빵이고 훈련일줄 알았는데 , 정작 그들이 목말라 하던 것은 인문학, 생각하는 감성이었던 것이다. 인문학과이면서도 한번도 대수롭게 생각한 적이 없었던, 그리고 힘이 되는지도 몰랐던 인문학이 이들에게 그렇게 필요한 것이었다니 놀랍다 못해 당황스러웠다. 이 이야기를 보고 관련된 이것저것 찾아보다보니 클레멘트 코스에 대해 알게 되었고, 자주가는 중구 유락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 학자의 생각이 실천의지를 만나 현실에 반응하는 모습은 담담한 서술에도 불과하고 충분히 감동적이다. 그리고 한 학자의 따듯한 시선과 의지에서 나왔지만 그 실현에는 극적인 일련의 사건들과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 있다.
 그가 이 코스의 영감을 받은 것은 한 여 재소자와의 대화에서 이다. 여재소자에게 “왜 사람들이 가난한 것같나요.”라고 물은 얼 쇼리스는 전혀 생각치 못한 대답을 듣는다.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얼선생님 그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이에 얼쇼리스는 그 대답이 가진 의미를 생각해본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이 왜 가난한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이어지게 된다.
 희망의 인문학에서 얼쇼리스는 빈곤에 대한 정의부터 새로 시작하고, 수치로 따지는 절대적 빈곤보다 훨씬 더 무서운 상대적 빈곤의 모습에 대해 분석한다. 상대적 빈곤은 경제란 지배규칙에서 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존중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꽃인 광고는 사람들에게 욕망을 심는 대신 박탈감을 가져오며 가능성이란 신기루는 그들의 삶을 더 비참하게 한다. 공정한 게임으로 보이는 이 게임은 사실 전혀 공정하지 않다. 차라리 칼뱅주의자들의 생각대로 성공한 사람들은 하늘이 선택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더 편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는 빈민들을 빈자로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하나의 키워드를 떠올린다. 그것은 바로 무력이다.
  도시빈민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무력’이다. 이 무력의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경제란 경주에서 진 패배감, 소외이기도 하고, 국가 권력(정당성을 가진 것이나, 이들에게는 정치성이 없으므로 무력으로서만 다가온다.)이기도 하며, 시기심과 증오이기도 하다. 이 ‘무력’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서로를 향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이 무력도 확대 재생산된다.  책에선 사우스 브롱크스의 아이들의 테니스 게임 이야기가 나오는데 , 사회복지사가 분명 줄을 정했는데도 불구하고 빈민가의 아이들은 서로 하겠다고 싸우며, 이를 정하는 순서는 더 크고 힘이 세다는 무력이다.
 이 무력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얼쇼리스는 그 방법으로 훈련이 아닌 교육, 그 교육을 통한 ‘시민’의 모습을 제시한다. 이 때 그 이상적 시민의 모습은 고대 아테네의 시민들이다. 물론 빈민들도 시민권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범위에 대해서는 아테네의 그것보다 베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유는 고대 아테네 시민의 경우는 정치적 삶과 문화적 삶을 같이 향유한 반면 현대 빈민들의 경우는 두가지 다 향유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든 삶은 필요로서 규정되어질 뿐이다. 이는 시민의 공적 삶, 행동하는 삶과는 먼 모습이다. 이에 그는 인문학이란 위험한 무기를 들이민다. 인문학이란 정치적 삶으로 안내하는 하나의 영감이자 도구이다. 정치적 삶은 그들 자신만의 삶이 아닌 서로를 위한 삶의 방향을 스스로 성찰하고 결정하게 만들어준다. 그 때 만들어지는 것은 ‘무력’ 아닌 ‘힘’이다. 얼 쇼리스는 그들 스스로가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인내를 가지고 안내자의 역할을 자처한다.
 물론 이 과정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책에서 얼쇼리스는 기금 마련등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그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도 만나며, 수업 코스중 몇몇 학생들은 개인적 사정으로 중간에 그만두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문제이상으로 그를 지지하고 돕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클레멘트 코스로서 변화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목격한다. 무력의 포위망에 빠져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던 학생들이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에 대해 토론하고, 안티고네의 고뇌에 대해서 토론하며, 역사의 사건을 해체하고 성찰해본다.
[미국 혁명의 급진주의에 나타난 고든 우드의 사상]에 대한 수업중 미국혁명에서 나타난  원주민에 대한 태도에 한 학생이 의문을 던진다. “우리나라를 세운 사람들이 그렇게 인문학을 좋아했다면, 어째서 원주민들을 그런 식으로 심하게 대했을까요?” 이에 아벨이란 학생은 “그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자기 통제 불능’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잖아요.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 무언지는 알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지요. 왜냐하면 자기 욕심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라고 이야기한다. 그들 모두 자기 통제가 불가능한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 아닌가. 그런 그들이 적들의 행동을 분석하는 방법을 갖게 된 것이다.  
 “미국의 성공은 언제나 빈민들을 ‘위험하지 않은 상태’로 묶어둠으로써 가능했다.”는 얼쇼리스는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가가 빈민들을 대하는 방식은 그들을 단지 훈련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성찰할 수 있는 능력과 정치적 기술을 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 정치적 삶을 살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 남는 것은 잔치 후 남은 떡고물 뿐이며 점점 견고해지는 무력 밖에 없다. 그 무력을 해체하고 힘으로서 대응하는 방법이 정치적 삶이며 그것이 가능케 하는 것은 인문학이다. 부자와 중산층들만이 향유했던  이 배타적 도구는 한 학자의 노력에 의해 모두의 도구로 태어난다 .그는 말한다. “타자의 행복을 보장하는 일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라고. 그리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으로써의 민주주의는 모든 것을 무릅쓸 만한 가치가 있는 위험”이라고.


 잡담 1:. 일독을 권한다. 아둔한데다가 글 솜씨가 형편없어 책이 전달하려고 했던 것의 99분의 1도 전달하지 못한 것 같다.
 잡담 2: 기독교가 기득(旣得)교로 보이기 시작한이후로 교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만 가지고 있었는데(예수님은 좋아함) 흑인 빈민층에 정치적 지위를 부여한 것도 교회라는 구절에서 교회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