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6일 토요일

나를 작게 만드는 TV

나를 작게 만드는 TV

장면1 심수봉씨의 잘먹고 잘사는 법

이른 아침 가게에서 일하시는 아버지는 아침이 항상 늦으시다. 대충 9시 정도가 되어서야 아버지와 아들은 밥상에 앉는다. 여느 한국남자들같이 소통이 서투른 부자에게 어색한 침묵이야말로 하나의 고통이다. 아버지는 리모컨의 빨간버튼을 누르신다.

Tv에서는 스타의 생활을 보여주는 방송에 심수봉씨가 나왔다. 트로트의 여왕, 엘레지의 여왕 심수봉아니던가, 아버지는 흥미가 가시는지 돌리던 채널을 멈추셨다. “정말 맛갈나게 노래부르지”라는 말도 덧붙이시며 회상에 잠기시는 듯 하다. 그 심수봉씨의 생활 무엇이었을까 하니 몇층되는 자기 건물을 까페처럼 차려놓고 손님들을 맞이하시는 것이랑 쭈욱 정리돼 있는 남편의 재즈앨범으로 남편의 재즈사랑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나로서는 이해가 안가는 인테리어 꾸미기였다. 우리는 서둘러 밥을 먹었다.

장면2-강수진이 될 수없는 이유-

휴학생에게 하루는 길면서 짧다.강의 몇강보면 끝나는 하루인 동시에,그안에 있는 불안과 지겨움은 길디길다. 그 지겨움속에 수요일 밤은 황금어장을 보는 즐거운 날이다.오랜만에 TV화면 앞에 앉는다. 쉬는 순간도 삶의 불안은 앉은 방석을 따끔따끔하게 한다. TV에는 발레리나 강수진씨가 나왔다. 그녀의 경이적인 모습에 감탄하고, 교훈을 얻는다. 아름다움에 숨겨진 그 고통을 본다. TV를 끄고 결심한다. 노력해야지, 죽을만큼 노력해야지 그 피눈물나는 노력을 해야지. 그러나 결심은 오래가지않는다. 이미 지금이 한계라는냥 더 이상 올라가주지 않는다. 이 땅의 많은 학생들도 같은 결심을 했을까? 슬픈 것은 그녀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이고, 궁금한 것은 내가 그녀처럼 되야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다는 사실이다.

장면3-별들의 소개팅-

주말이 되어 잠시 TV앞에 앉아있다. 원래는 무한도전밖에 안보지만 답답한 마음에 TV를 일찍 켰다. TV에서는 스타 친구를 소개합니다 라는 프로가 하고 있었다. 스타들이 나오고 주선자들의 소개가 나온다.하나같이 잘생기고 이쁜 이 사람들의 직업은 쇼핑몰 사장, 기상캐스터, 유학파 학생 등등이다. 요즘 결혼 정보회사는 등급을 매긴다는데 이들은 몇등급일까?

불행상자를 끄다.

오늘부터 TV를 보지 말아야겠다라는 결심과 함께 이 글을 시작한다. 불행한 사람이 TV를 훨씬 오래 본다는 충격적인 연구결과를 보고서 행복하려면 TV스위치부터 끄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바보상자네 뭐네 이야기가 많은 물건이었지만 삶의 최고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행복마저 잡아먹는다고 하니 등골이 오싹하다. 연구진은 “이처럼 상반된 결과는 TV가 잠시 기쁨을 줄 수 있을진 몰라도 장기적인 불행감이 뒤따른 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찰나의 기쁨뒤에 장기적인 불행감이라, 단지 띨띨한 바보상자로 보았는데(바보는 오히려 행복할는지 모른다) 생각보다 무서운 불행상자였던 것이다.

요즘 막장 방송들 마냥 처음부터 너무 독한지 모르겠다. 그럼 방송을 만드는 그 많은 PD와 작가들은 불행을 퍼뜨리기 위해 그렇게 불철주야 노력을 했던 것일까? 얼마전 KBS 연예대상에서 황현희 씨는 개그 콘서트를 유해 프로 1위로 선정한 단체를 향해 아이디어 회의하는 것을 한번이라도 본다면 그런말을 못할 것이라고 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방송인들의 노력과 열정을 보면 불행상자라는 말은 감히 못할지 모른겠다 .하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최악의 결과는 항상 최선의 의도로 시작’되는 법. 노력과 결과를 등치해서 봐달라? 투정도 이런 투정이 없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지만 여기 낄 말은 아닌 듯싶다. 그것이 부동의 매체 영향력 1, 4권력, 그 결과물만 시청자가 볼 수 있는 TV라면 말이다.

그럼 이 바보상자는 왜 불행상자가 되어버렸을까? 이를 알기 위해선 당연하지만 간과하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싶어 보는 이 프로그램은 누군가가 만들어서 내보내는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프로그램은 연출가의 결과물이다. 연출가는 세상속의 무궁무진한 소재중에서 주제를 설정하고 포맷을 설정하고 주인공을 설정한다. 연출가가 관심을 가져준 대상, 소재 그리고 인물은 우리의 관심밖에서 관심의 영역으로 자연스레 들어오게 된다. 이 때 이 단순한 행위속에서 객체가 겪는 변화는 새로운 창조에 버금가는 것이다. 무관심에 숨겨져 있었던 객체는 매체를 거쳐 관심의 영역으로 오게 되고 하나의 주체가 된다. 어느 소설가의 후기처럼 무엇을 만든다는 것은 신의 영역과 맞먹는 일일지 모른다. 그런데 이 선택이 불어놓은 숨결은 어떤 존재를 관심의 영역에 끌어오는 동시에 다른 존재들을 자연적으로 제외시킨다. 문제는 그 제외가 사회적 계층구조와 맞물려 소외로 이어질 때이다. 그럼 예능이 선택한 주인공들을 보자.

- 황금어장-

절대 시덥잖치 않은 분들의 시덥잖은 고민

먼저 황금어장에서 나오는 주인공 다시 말해 토크 의뢰인들을 살펴보자. 대다수의 사람도 고민하지 않을 것같은 시덥잖은 고민을 들고 오는 의뢰인들은 전혀 시덥잖은 사람들이 아니다. 유명한 배우, 가수, 세계적인 발레리나, 소프라노, 역도선수 등 그들은 그들의 분야에서 톱을 달리는 사람들이다. 누구도 부러워 할 재능, 피나는 노력, 뜨거운 열정을 가진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없다. 운마저도 그들에게는 당연히 따라 올 선물인듯 보인다. 또 라디오스타에서 무릎팍도사에 가시지 왜 여기 오셨냐는 문희준의 말에”야 형이 아직... 왜그러냐” 라며 부끄럽게 얼버무리는 성진우의 말처럼 여기오는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급이 되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이지만 그 삶의 영광 속에는 왠만한 사람은 감당 못할 시련도 있고 사연도 있다. 이들의 성공스토리와 진솔어린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온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잠자리에 누울시간, TV속 의뢰인은 내일의 다짐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벅찬 감동이 가라앉고 차갑게 마주앉은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불안을 경험한다. 이 불안은 어제의 벅찬 감동을 고까운 감정으로 바꿀 수도 있을 만큼 작지않은 것이다. 여기서 마주한 불안의 정체는 무엇일까?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이란 책에서 현대인에게 다가온 불안에 대해 몇가지 진단을 한다. 그 중 하나는 근대에 발생한 자유가 가져다 준 불안이다. 근대에 이르러 우리는 우리를 가로막는 모든 계급에서 벗어났다. 우리는 ‘표면적’으로 무한히 자유롭다. 그 자유속에서 우리는 성공에 대해서도 자유롭다. 우리는 우리들의 노력등에 따라 가수 비처럼 될수도 있고, 영화감독 류승완 처럼 될 수도 있으며, 발레리나 강수진처럼 될 수도 있다. 이 무한히 열린 가능성은 우리에게 하나의 선택으로서만 다가오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그런 무한한 가능성속의 당신의 위치, 즉 왜 당신은 강수진처럼 비처럼 될 수 없는 것인가?

그 답은 그들의 성공스토리에 있다. 당신은 장미란 같은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당신은 이준기처럼 무모하게 달려들지도 못했다. 당신은 강수진처럼 하루를 치열하게 살지 않으며, 비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다. 당신에게 선택으로서만 다가오는 듯 보인 성공에 대한 자유는 사실 여러 요소들의 집합체다. 하지만 착각이 현실에 부딪혀도 우리는 그들을 외면할 수 없다. 성공신화에 빠진 한국에서 그들은 하나의 지향점이며, 그들은 화면속의 주인공인 동시에 사회의식 속에서도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당신과 이들의 간극은 그만큼의 불안과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이는 의식적 감동 속에서 만들어진 무의식적 불안이다. 도란 도란 살아가는 대다수의 시민들이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주인공일텐데 옛날로 치면 광대와 기능인들이란 작은 지향점은 성공고문을 하며 사람들을 옭아맨다.

스타의 잘난 친구를 소개합니다.

예전 불문과 교수의 교양강의를 듣다가 파리의 대학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 그 교수님에 따르면 파리에서도 엘리트만 다니는 서울대같은 곳이 있지만 그 대학이 문화등 어떤 면에서도 중심을 서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물론 미디어도 이들에게 관심을 쏟지 않는다. 서울대 교수들 시국선언이 대서특필되고 다른 총학생회는 안나와도 서울대 고대 총학생회 이야기가 언론에 흘러나오는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신기한 문화적 차이였다. 동시에 떠오르는 의문, 사회적 문화적으로 만들어진 주류라서 미디어가 비춰주는 것일까? 미디어가 비춰줘서 주류가 되는 것일까?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이 근원적 물음은 스친소에도 동일하게 던질 수 있다. 스타의 친구들을 보고 싶어서 ‘스타의 친구를 소개합니다(이하 스친소)’가 나온 것일까? 스친소가 나와서 스타들의 친구들을 보고 싶은 것일까? 혹시 답은 고등학교 객관식 최고의 답이었던 상호보완적인걸까?

떠올려보면 스타에 관한 프로그램은 소재에서 계속 영역을 넓혀왔다. 단순히 토크쇼에 나와서 사회자가 질문을 하고 듣는데서 만족하지 못한 대중은 스타의 사생활(MBC 섹션TV 연예통신)을 보고 싶어하고, 스타들의 친구들을 보고 싶어하며(KBS2 반갑다 친구야) 심지어 스타들의 아이들(SBS 스타쇼 붕어빵)까지 보고 싶어한다. 이런 대중적인 요구를 생각해볼 때 스친소는 이쯤에서 나올만한 프로그램중 하나였음에 틀림없다. 그동안 프로그램적으로 별 변화없이 내용을 유지했다는 것은 시청자가 그만큼 큰 충격없이 이를 잘 받아들였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시청자의 요구에 반응하여 나온 스친소이지만, 이를 보는 시청자들의 입장은 편치않다. 스타가 데리고 나온 이 ‘일반인 아닌 일반인’을 어떤 시선으로 봐야할지 당황스럽기 때문이다. 이는 스타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우리들은 스타를 스타로서 바라봐 줄 자세가 되어있다. 스타는 이야기 속에 송혜교네 김태희네 라며 회자되는 친근한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길가다가 누구 봤네라고 자랑할 만한 대상이기도 하다. 코디, 매니져가 아닌 이상 스타들은 별천지에 사는 사람들이고 , 그러한 암묵적합의속에서 스타들은 살아간다. 하지만 그 스타들이 데리고 나온 친구들에 이르면 이야기가 틀려진다. 스타의 후광을 업고 나오는 그들이지만 그들은 우리와 같은 일반인의 범주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프로그램 시작 얼마 지나지않아 시청자는 그들이 일반인이 아닌 일반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잘생기고 키큰 유학파 출신 학생, 날씬하고 잘 빠진 쇼핑몰 사장 등등 그들이 내뿜는 후광은 스타들의 후광 못지 않다. 그리고 그들과 스타가 합쳐져 하나의 무리를 그려낼 때 보이는 것은 웬만해선 다가갈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이다. 결혼 정보회사 1등급을 모아논 듯한 이 별들의 소개팅은 대부분 청춘남녀들의 삶과 사랑을 비주류로 몰아 넣는다.

소외를 넘어서

백만장자의 쇼핑백(ETN)’을 보고 있는 여고생, 혹은 여대생은 저 라이프 스타일을 누릴 능력이 있는 것일까? 그들에게 저 프로그램은 과연 프로그램 의도처럼 ‘정보’일까? 여고생은 보고 싶어하는 프로그램을 보고 자본주의적 욕망과 불안 속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진 않았을까?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스스로를 소외시킬 수 있다. 우리는 보고 싶어하는 프로그램과 내가 보면서 행복할 프로그램의 차이를 알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바보상자의 진행형, 그리고 연결점은 불행상자이다. 우린 바보처럼 웃으며 보고 난 뒤 불행해질 수 있다. 이는 연출자에게 새로운 책임을 부여한다. 연출자는 실적 증가치(=시청률) 쫓는 영업사원(=PD) 마냥 시청자들의 요구에 기계적인 제공만을 해서는 안된다. 휘발하는 웃음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해서도 꾸준히 관심을 쏟아야한다. 웃음에서조차 제외된 존재에 대한 시선이 필요하고, 높아가는 위화감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한다. 그들이 PD가 되었을 때 많이 들었을 전파의 사용에 대한 책임과 지상파의 공영성은 미디어의 영향만큼이나 크기 때문이다.

굿모닝 아니 굿바이 미스터 오웰

개인적으로 백남준씨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품을 좋아한다. ‘TV는 인간을 폭압하는 수단’ 이라며 1984년이 되어 빅브라더가 모든 것을 통제할 것이라며 경고한 오웰에게 백남준은 1984년이 되자 아무 일도 없지 않느냐며,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란 퍼포먼스를 했다. 온갖 걱정을 다 한 사람들에게 이거봐 아무일 없었지라며 기술, 나아가 사람에 대한 믿음과 따듯함을 보여준 백남준씨가 존경스러웠다.

지금 나는 내가 오웰이길 바란다. 예능 프로들때문에 소외와 불안이 확산된다는 내 생각을 연출자들이 보기좋게 뒤집었으면 한다. 내 모든 걱정들이 기우이자 착각이었으면 한다. 예능에서의 따뜻한 웃음을 다시 느껴 봤으면 한다. 건강한 웃음이란 인생에서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고, 그 즐거움 속에 우리는 행복을 더 윤택하게 가꿀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웃음상자 TV의 출연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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