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기사를 읽다보니 요즘 초식남이 뜨는가보다. 연애에 관심이 없고 자기 소비에 치중하고 생활을 가꾸어가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그 정의를 듣고서 이들을 어떻게 봐야할까 혼란스러워졌다. 내 주위에 철벽녀는 몇 봤어도 남자들은 다 사랑을 갈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더 이해하기 힘든지 모르겠다.
매트로 색슈얼이 뜰 때만해도 그들은 내게 문화적 현상으로서 이해되었다. 사회에서 마초들이 희화화되고(KKK단이 사라져가는건 그들을 억압해서가 아니라 영화등의 매체에서 그들이 비웃음을 사기때문이다.)화장품회사등에서 남성들을 마케팅 타겟으로 삼으면서 그들은 외모에 신경쓰는 새로운 소비주체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문화적인 흐름을 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래도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기위한 마음은 사라지지않았었다고 본다. 오히려 이성의 마음을 사로 잡기위해서 그런 트랜드에 편승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초식남들은 이성에 대한 욕망 감정을 소비 혹은 취미등에다가 투영하고 거기서 멈추는 경우인데, 뭐랄까. 이들은 성욕같은 근원적인 것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물질욕과 성취같은 피상적인 것에 적을 두는 사람들로 보인다 . 프로이트는 초자아가 이드를 너무 억압하면 문제가 생긴다고 했는데 그들을 억압하는 초자아는 대체 무엇일까? 그들은 자기 외모와 소비자체에 욕구가 고정되어 있는 것일까?
피카소가 6명의
여인과 평생 연애하면서 산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6명 맞나?)
그런 연애경험이 피카소에게 기발한
창조적 상상력을 주었을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조지부시같은 사람들은 그
정반대에 서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차라리
여자좋아한 클린턴시절 세상이 그나마 조용했던 반면
조지부시때는 미사일이 날아다녔다. 그는 성욕을 성취와 권력욕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인물같은 느낌이 든다.(명박이형도. 명박이형은 사랑해봤을까?)
쇼펜하우어는 잠언록에서 건강과 같은 근원적인 것을 추구하라고 한다. 또 행복하기보다 고통을 피하라고도 한다. 초식남들은 어느 경우일까? 내게 그들은 고통을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자기가 행복하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냐만은 )연애, 사랑이 전 우주적 가치도 아니고 사랑이 근원적인지는 확실하게 이야기 못하겠으나 온갖 문학작품들 , 영화들 , 노래들이 그것을 위해서 나오는 것을 보면 그들의 나르시시즘, 취미, 물질욕보다는 한참 위에 있는 것 아닐까? 주변에는 울고있는 늑대들만 있어서 그런지 이런 추세가 신기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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