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30일 수요일

(모드2)글쓰기의 공중부양 : 언어의 연금술사 이외수가 전해주는 신비한 문장백신



 이 책은 무슨 책이야?
응 그 괴물인가 쓴 아저씨 있잖아 그 아저씨가 쓴 책인데 글쓰기 방법 알려주는 책이래

재밌어?
읽을 만 해

보니까 글 좀 잘 쓰겠든?
그건 모르겠어 어차피 방법 적어놓은 책이라 내가 직접 해봐야지 뭐 거기 써있는거 천천히 해볼까 생각중이야

뭐 하라는데?
생어인가 채집해서 노트같은거 만들고 이리저리 사물에 대해 의문 가져보래 궁극적으로는 심안으로 사물을 파악하라네.

글쓰는 방법만 써있어? 어렵겠네
아니 잼나는 일화같은 것도 있고 예시같은 것도 나름 되 있어서 읽기 편해 근데 뭐 이런 책이 다 그렇듯 실천하기는 힘들지.

사고는 싶어?
응 첨엔 후딱 읽었는데 , 글쓰기 방법 말고도 두고 두고 볼 만한 내용도 있어서 사고 싶어.

가장 기억남는 건 뭐야.
모든 거에 애정을 가지라는 것. 나도 좀 그러고 싶다.

(모드1)글쓰기의 공중부양 : 언어의 연금술사 이외수가 전해주는 신비한 문장백신

<목차>
공중부양에 대한 일화
글이란 무엇인가

1부 단어의 장
2부 문장의 장
3부 창작의 장
4부 명상의 장

마지막으로 던지는 질문 하나
체험의 글 : '나는 당신이다' _ 기노 / 이외수의 '글쓰기의 공중부양'을 소개하며

<소개>
<글쓰기 공중부양>은 소설가로 유명한 이외수씨가 글쓰는 방법을 전해주는 지침서이다. -짤막한 소개-
<글쓰기 공중부양>은  단어, 문장 , 창작 , 명상의 네 장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장은 세부 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저자는 각장에 대한 설명과 함께 예시를 들어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구성-
 저자는 단어를 채집하고 다르게 생각해보는 일부터 문장을 다루는 법, 나아가 창작을 하는 법까지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기본적인 글쓰기 방법부터 창작하는 응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을 배울 수 있다.-가능성 및 필요-
<주제>
 이외수가 이 책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한 애정이다. 저자는 사람의 눈을 얼굴에 붙어 있는 육안 두뇌에 붙어들어있는 뇌안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는 심안 , 영혼 속에 간직되어 있는 영안으로 나눈다. 저자는 일차적으로 속성과 현상을 육안과 뇌안으로 파악하고 본성과 본질을 심안과 영안으로 파악하라고 주문한다.
<읽은 기간 및 장소>
3일에 걸쳐 네번끊어 읽음
장소 지하철    도합시간 모름  읽은 속도 빠르게
<구한 방법> 도서관 대여. 
<써먹을 수 있는 방법>
1. 생어 채집. 
--1 생어채집이란?
 이외수는 생어를 중심으로 단어채집을 하라고 한다. 사어는 절망, 허무, 총명, 흉기와 같이 눈,코,입,귀,피부로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생어들은 앞에 언급한 오감을 자극하는 언어이다.

 그는 흉기로 자주 자해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   흉기 자해 - 사어
 그는 뻑하면 회칼로 자기 배를 그어대는 습관이 있었다. 회칼 배를 그어댄다 -생어-

--2 생어 채집의 예 (자기 주변으로 시작하기)
 머리 대가리 대갈통 대갈빡 골 스포츠 머리 , 백발 , 잔머리 , 돌대가리 , 이마

--3 생어채집의 예(대표 감각으로 시작하기)
 시각 코딱지 가래침 저녁놀  촉각 사포  후각 스컹크 방귀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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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1일 화요일

[펌][고종석 칼럼]노무현 생각

[고종석 칼럼 2008년 2월 21일] 노무현 생각

며칠 뒤면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난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를 지지한 사람이든 반대한 사람이든, 노무현 시대에 점수를 후히 매기는 것 같진 않다. 무엇보다, 지난해 말 대통령선거에서 구여권 후보가 겪은 참담한 패배에는 노무현에 대한 평가가 얼마쯤 반영돼 있었다.

그가 취임하기 직전, 나는 대통령 노무현의 가장 큰 업적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일 수도 있다고 쓴 적 있다. 새 대통령의 발걸음에 딴죽을 걸겠다는 악의로 한 말이 아니라, 소수파의 호민관으로서 대한민국 제1시민 자리에 다다른 정치역정을 기린 말이었다.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 처지에서 보면 아쉽게도, 노무현은 결국 대통령이 된 것 이상의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일반 시민으로 돌아올 참이다.

■ 리버럴 진영의 트로이 목마

힘 센 사람들을 향한 노 정권의 투항이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고 판단된 세 해 전, 나는 어느 글에서 노무현이 트로이목마일지도 모른다고 비아냥거린 적 있다. 복고주의자들이 리버럴리즘 진영을 무너뜨리기 위해 보낸 트로이목마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 비아냥거림을 뉘우칠 계기나 기회를 그 뒤에도 얻지 못했다.

노 정권 5년간, 서울 강남을 지역적 이데올로기적 고리로 삼은 재벌-관료 동맹은 그 전보다 더욱 튼튼해졌다. 그리고 이 신성동맹은 곧 출범할 이명박 정권에서 만세동락을 구가할 모양이다.

노무현은 힘센 친구를 새로 얻기 위해 힘없는 친구를 버렸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배신이 또렷해진 뒤에도, 그 배신으로 이득을 본 세력은 그의 친구가 돼 주지 않았다.

노 정권 덕분에 재산을 단단히 불린 땅 부자들, 집 부자들, 대자본가들은 5년 내내 노무현을 저주했다. 옛 친구를 버리고서도 새 친구를 얻지 못함으로써, 다시 말해 모두를 적으로 돌림으로써, 노무현은 기이한 방식으로 국민통합에 기여했다.

노무현이 사면초가에 놓인 이유 하나는 그의 배신이 전면적이지 못했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권력을 시장에 헌납함으로써 노무현은 과감히 경제적 강자 편을 들었으면서도, '민주화세력'이라는 자신의 상징적 기득권은 포기할 뜻이 없었다. 소위 '과거사 정리'라는 것은 역사적 정통성에 대한 이 욕망과 관련 있었을 테다.

그런데 이 '과거사 정리'는 그가 버린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삶과 별 관계없는 '정권의 취미'로 보였던 데 비해, 그가 새로 친구로 사귀고자 했던 힘센 사람들에게는 제 존재의 기반을 건드리는 민감한 문제였다.

다섯 해 전 새 대통령을 뽑을 때, 한국 유권자들 마음 속에선 윤리적 욕망이 파닥거렸다. 지난해 말 새 대통령을 뽑을 때, 그들 마음속에 윤리적 욕망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이 렇게 된 이유 가운데 큰 것이 자신의 행태였음을 노무현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탈-윤리 대통령 이명박은 윤리 대통령 노무현이 다섯 해 동안 진화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오래도록, 한국 유권자들은 정치적 결정에 윤리가 끼어드는 걸 꺼릴 것이다.

■ 윤리적 출발, 탈-윤리적 종말

공 정함을 위해서, 적대적 언론의 반노 선동이 커뮤니케이션을 왜곡해 정권을 고립시켰다는 대통령과 그 주변의 하소연에도 일리가 있었음을 지적해야겠다. 정파 신문들이 판치는 한국 저널리즘 시장에서 노무현에게 호의적인 매체는 드물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권에 대한 여론 악화를 크게 거들었다.

새 대통령 당선자나 인수위의 최근 천둥벌거숭이 행태를 노 대통령이나 그 주변사람들이 벌였다면, 정권이 뒤흔들릴 정도의 십자포화를 언론으로부터 받았을 것이다.

이것은 노무현 시대를 평가할 뒷날의 역사가가 이 시대 신문들을 사료로 쓰는 데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글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노무현과 노무현 시대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분명히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조차, 노무현이 실패한 대통령이었음은 엄연하다.

[펌][고종석 칼럼]'안티조선'의 추억

[고종석 칼럼] '안티조선'의 추억


옛날옛적에 '안티조선 운동'이라는 게 있었다.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이 김대중 정부의 정책 입안에 간여하던 정치학자 최장집씨의 사상을 검증하겠다고 소동을 벌이자, 이 신문의 행태를 보다못한 시민사회 일각에서 벌인 일종의 소비자운동이다. 정치인 노무현도 이 운동에 한 발을 걸쳤다.

사실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조선일보와 단호하게 각을 세운 것도 한 몫 했다. 냉전수구세력의 선전국과 표나게 맞섬으로써, 그는 자신을 개혁의 아우라로 치장할 수 있었다.

노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조선일보는 정권 핵심부의 '좋은 파트너'였다. 정권 주변에서 추문이 터져도, 제 구실 못해서 지지율이 곤두박질쳐도 모든 게 다 조선일보 탓이었다. 그것이 처음엔 어느 정도 먹히기도 했다. 한국 저널리즘 언어의 비속화를 선도한 신문답게, 조선일보의 정부 비판은 가히 저잣거리의 싸움질을 연상시켰으니까.

● 청와대의 조선ㆍ동아 취재거부

그러나 싸우면서 닮아가는 것인지, 노 정권 핵심부의 말대꾸도 그리 점잖지는 않았다. 게다가 조선일보 기자들이 슈퍼컴퓨터가 아닌 다음에야, 늘 틀린 말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예컨대 노 대통령의 말에 절제가 없고 사람 쓰는 방식이 비상식적이라는 건 조선일보가 지적하든 한겨레가 지적하든 옳은 말이다.

이 정권의 흐트러진 몸가짐은 자주 조선일보 기사의 사실성을 높이며 안티조선 운동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흐트러진 몸가짐이 조선일보에 대한 일종의 '계산된 보은'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한편, 정권의 조선일보 탓하기도 지침 없이 이어지고 있다. 늘 몇 걸음 뒤처져서 조선일보 따라하기에 바쁜 동아일보도 언젠가부터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지난 주에 청와대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취재를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빌미가 된 기사들이 한 인터넷 신문에 전재돼 있었는데, 읽어보고 좀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와대의 조처가 정당하다거나 부당하다는 판단을 하려는 게 아니다. 동아일보 칼럼 둘은 과연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문제삼은 조선일보 기사('계륵 대통령')는, 막말에 관한 이 신문의 오랜 명성을 생각하면, 차라리 온건했다.

지난 대선 때의 노 대통령 발언을, 경쟁자의 비열한 색깔론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라는 맥락을 거세하고 난데없이 인용한 대목에서 말의 비수가 느껴지긴 했으나, 그것은 이 신문이 어제오늘 해온 짓이 아니다. 갑자기 이 기사에 청와대가 화를 낸 것이 뜻밖이었고, 그래서 조선일보가 '부당하게 끼워 팔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노 정권과 조선일보의 티격태격에는 기이한 구석이 있다. 이라크 파병에서부터 한미 FTA 밀어붙이기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국가운영 철학'을 큰 테두리에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들의 상호 증오는 유전자에 기인한 '인종적 배타성'이거나, 시쳇말로 '적대적 상호의존'에 가까운 것 같다. 노 정권은 조선일보를 계속 탓함으로써 다 떨어진 '개혁성'을 과시하고, 조선일보는 정부를 물어뜯음으로써 알량한 '비판지'의 명성을 누린다.

● 정권·수구언론 기이한 의존관계

이렇게 이념이나 철학으로 보아 안티조선 운동을 안 해도 될 청와대 사람들은 이 운동에 열심이고, 정작 안티조선 운동을 해야 할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꿀 먹은 벙어리다. 지난 주, 출판사 창비 사이트의 '창비주간논평'이라는 방에는 백낙청씨의 '시민참여형 통일과 민간통일운동'이라는 글이 실렸다.

'시민참여형 통일'이나 '민간통일운동'에 대한 이 글의 진단과 전망이 얼마만큼 현실에 뿌리박고 있는가에 대해선 판단하고 싶지 않다. 확실한 것은, 백낙청씨가 생각하는 통일운동에 가장 적대적인 세력이 조선일보라는 점이다.

안티조선이 꼭 '운동'이 돼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때로 '태도'나 '몸가짐'으로 족하다. 백낙청씨와 창비가, 아름다운 말씀들을 늘어놓는 틈틈이, 안티조선의 '태도'나 '몸가짐'이라도 갖추었으면 좋겠다. 분열증은 미덕이 아니다.

[펌][고종석 칼럼] 인문학의 위기?

또 다시 인문학의 위기가 왔다고 한다. 잊을 만하면 되풀이되는 이 ‘인문학 위기’ 담론은 많은 논점을 생략한 채 자족적으로 선포되는 일이 예사다. 그 누락된 논점들 가운데 몇 개만 엿보자. 우선, 흔히 ‘문사철’(문학 역사학 철학)로 압축되는 인문학은 다른 분과학문들보다 내재적으로 더 가치 있는 학문인가? 6세기 한반도의 세 나라 국경을 획정하는 일이 DNA 분자구조를 해명하는 일보다 더 가치 있다고는 누구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을 테다.

인문학이라는 것의 개념과 경계도 흐릿하다. 손쉽게, 인문학을 인간 자체를 탐색하는 학문이라 정의해보자. 그럴 경우 인간의 DNA 분자구조를 해명하는 일이야말로 인문학의 일감이다. 그렇다면 다시, 인문학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탐색하는 학문이라 정의해보자. 그 경우에도, 철학이나 문학 연구보다는 뇌신경학이나 인공지능 연구 쪽이 인문학의 목표에 더 적합하다.

● 학문의 위기냐, 교수들의 위기냐

소위 자연과학의 인간 탐구 방식은 소위 인문학의 그것과 너무 달라 이를 나란히 견줄 수 없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인문학자들이 더러 경멸의 눈길을 건네는 경영학은 어떤가? 경영학의 인사관리론이야말로 인간 정신세계에 대한 섬세한 탐색의 결실이다.

인문학은 경영학 같은 응용학문이 아니라 기초학문이라고? 그 경우에, 인문학자들은 제 영역을 사회과학과 명확히 구분해야 하는 난제에 부딪친다. 이를테면 심리학처럼 인간 존재에 밀착된 기초과학은 인문학인가 사회과학인가? 하나마나한 대답이 있다. 심리학과가 문과대학(인문대학)에 속해 있으면 인문학이고 사회과학대학에 속해 있으면 사회과학이라는.

이 모든 난점을 해결해도, ‘교배’와 ‘해체’의 문제가 남는다. 18세기 한국 경제 연구는 인문학(역사학)의 일감인가 아니면 사회과학(경제학)의 일감인가? 역사학자가 연구하면 인문학이고 경제학자가 연구하면 사회과학인가? 대뜸, 접근 방법이 다르다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이를테면, 월러스틴을 빌려와, 경제학자의 18세기 경제 연구는 ‘법칙정립적’ 사회과학이고, 역사학자의 18세기 경제 연구는 ‘개성기술적’ 역사학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 둘은 실천 수준에서 늘 뚜렷이 구분되는가? 사학과 교수 김용섭의 ‘조선후기농업사연구’는 ‘개성기술적’이고, 경제학과 교수 이영훈의 ‘수량경제사로 본 조선후기’는 ‘법칙정립적’인가?

그렇게 또렷이 구분된다는 것 자체가 믿기 어렵지만,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지금 거론되는 인문학 위기는 인문대학의 위기, 인문대학 교수의 위기를 에둘러 말하는 것 같다.

한국 인문학 수준이 날로 쇠퇴해간다는 증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법과대학의 법철학자, 의과대학의 의사학자(醫史學者), 언론학과의 기호학자들은 ‘인문학 위기’를 거론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인문학 위기는 인문대학 지망생들의 감소에 따른 인문대학 교수들의 존재론적 위기인 것이다.

그런데 인문학을 살려야 한다는 주장은 서로 모순되는 논거를 동시에 취한다. 학문이 시장원리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돈벌이와 관련된 학문만 해서는 안 된다는) 명제와, 인문학이야말로 시장 친화적이라는(인문학이 제대로 돼야 돈이 벌린다는) 명제다. 최근에도 이런 모순되는 말이 한 인문학 교수 입에서 나오는 걸 듣고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논리학은 인문학이 아닌 모양이다.

● 인문학ㆍ대학은 시장을 ‘넘어’ 가라

시장이 인문학에, 정확히는 문과대학에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그런데 한국의 문과대학은 시장보다 나은가? 제대로 작동하는 시장에서라면 마땅히 해체됐을 내부의 온갖 봉건적 권력관계와 연줄 문화에 포박돼 있지 않은가? 문과대학을 포함해 한국 대학은 대체로 시장 이전에 있다.

다시 말해 시장에 미달한다. 대학이 시장 너머로 나가려면 우선 시장을 통과해야 한다. 시장은 적어도 자신의 존립 근거인 ‘합리성’으로 대학을 지금보다는 민주화할 수 있다.

[펌][고종석 칼럼]마르크스라는 유혹

‘마르크스의 거대한 귀환.’ 프랑스 시사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 최근 호의 커버스토리 제목이다. 표제가 하도 거창해서 본문에 눈길을 주었는데, 별것 아니었다. 근년의 경제 위기가 다시 마르크스 붐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 자본주의 심장부인 뉴욕 월스트리트에서까지 ‘마르크스가 옳았다’는 외침이 터져나온다는 것, 이 19세기 경제학자가 예언한 ‘자본주의 체제의 필멸’을 많은 사람이 다시 떠올리고 있다는 것. 상투적 마르크스 예찬도 고명처럼 얹혀 있다. “오늘날의 세계화 시장경제를 분석할 수 있는 최량의 지적 도구들은 마르크스의 책에 있다” “돌아와요 마르크스! 사람들이 미쳤어요!”

   

마 르크스를 향한 이런 초혼가(招魂歌)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때때로 울려 퍼질 것이다. 세계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그럴 것이고, 어렵지 않을 때라도 지식인 사회 일각에서는 무시로 그럴 것이다.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어느 프랑스인이 야유의 맥락에서 비틀었듯, “마르크스주의는 지식인의 아편”이므로. 유럽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식분자가 적잖다.
그러나 가까운 앞날에 자본주의가 사멸할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의 야만스러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크게 교정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숨쉬는 공기는 여전히 자본주의의 공기일 것이다. 시장경제라는 의미의 자본주의 말이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 예찬은 그의 이름으로 20세기의 70년간 저질러진 ‘역사의 범죄’에 눈을 감는 짓이다. 지금부터 스무 해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체제에 금이 쩍 갔을 때, 그것을 역사의 반동이라고 말할 수는 결코 없었다. 그것은 자유와 존엄을 향한 인류의 욕망이 내딛은 거대한 발걸음이었다. 일각에서 고르바초프는 제 권력 기반인 공산당을 스스로 무너뜨린 ‘바보’로 기억되지만, 그는 더 많은 사회주의가 더 많은 억압을 뜻한다는 걸 깨닫고 용기 있게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위대한 단독자다.

물 론 마르크스의 연인들은 그 이름을 때 묻은 현실사회주의와 연루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이, 더 근본적으로는 레닌이 구부러뜨리기 이전의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꿈꾼다. 그러나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역사적 사회주의에서 떼어놓으려는 시도는 덧없고 비겁하다. 우리에게 알려진 마르크스주의 체제는 유혈 낭자했던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뿐이므로. 스탈린의 사회주의, 마오쩌둥과 엔베르 호자의 사회주의, 차우셰스쿠와 폴 포트와 김일성의 사회주의 같은 것들 말이다. 지상에 건설된 마르크스주의 체제는 이 독재자들의 체제였다. 이 학살자들이 입에 달고 살았던 마르크스가 바로 역사적 마르크스, 우리가 아는 실존인물 마르크스다. 이들에게 불려나온 마르크스 말고 다른 ‘진정한’ 마르크스 같은 것은 없다. 아니 ‘진정한’ 마르크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자본주의를 지양해 이룩할 더 나은 사회에 그 이름을 갖다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체제’가 이 이름의 함의를 거의 남김없이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마르크스’라는 장신구로 치장하고 싶은 사람들

실 상 마르크스의 새 연인들도 그의 부활을 실제로 바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그저 ‘진정한 마르크스’라는 때깔 좋은 장신구로 저를 치장하고 싶은 것일 게다. 그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가장 ‘자본주의적인’ 자본가들 처지에서도 받아들일 만한 일이다. 담론은, 그것의 ‘불온함’이 근본주의에 가까워질수록, 현실과의 접촉면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니 말이다. 현실의 자본과 권력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자본주의 타도’를 요구하는 근본주의적 구호가 아니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법인세율을 조금 높이라는 요구, 서민 복지를 조금 늘리라는 요구, 노동 현장에서든 거리에서든 법정에서든 양식(良識)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연대의 움직임 같은 것이다.

용산 참사가 일어난 것이 마르크스주의 부족 때문이 아니듯, 재벌이 죄짓고도 벌받지 않는 것이, 기무사가 민간인들을 사찰하는 것이, 평화 시위가 공적 폭력에 노출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가 모자라서는 아니다. 심지어 실업자와 비정규 노동자가 늘어나고 사회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조차 마르크스주의 부족 때문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향한 한 줌의 정치적 욕망, 한 줌의 정의감, 한 줌의 시민적 양식이다.

[펌][고종석 칼럼] 정치인의 책 쓰기

<한국일보>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정치인이 문필업을 겸할 필요는 없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권력의지나 통찰력, '싸움의 기술' 같은 것이지, 문장력이 아니다. 그러나 적잖은 정치인이 책을 내고 떠들썩한 출판기념회를 연다. 대개 자기 홍보용 팸플릿에 가까운 책이다. 제 '화려한' 이력을 과장해서 기록하고 있는 그 책들을 그 '바쁜' 정치인이 직접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정치인이 제 이름으로 내는 책을 꼭 제 손끝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변사람들의 도움을 받더라도, 그 알갱이가 자신의 생각이어야 함은 엄연하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자서전들'을 들추다 보면, 이건 완전한 대필이구나 하고 짐작하게 하는 대목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진보적 자유주의의 길?

나는, 다른 전문직 종사자처럼, 정치인들도 힘닿는 한 책을 많이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 이력을 화사하게 포장한 자서전류 말고(그런 자서전류는 은퇴한 뒤에나 쓸 일이다), 제 정치적 비전과 야심을 드러내는 책 말이다. 그러나 그런 책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지식인 출신의 정치인들도, 정치판에 일단 발을 들여놓고 나면, 집필과는 담을 쌓는 것 같다.

예외 하나가 언뜻 떠오른다. 한국과 영국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고 교수생활을 하다 정계로 들어간 사람이 새 천년 들머리에 <진보적 자유주의의 길>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책을 읽은 뒤,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그 책을 학자로서 쓴 것인지 정치인으로서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텍스트의 밀도는 저자의 미끈한 교육배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을 여기저기 파헤쳐 놓은 듯한 그 책은 외적 일관성도 없었다. 그가 말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는 당시 김대중 정권의 노선과 매우 닮았는데도, 그는 김 정권에 대한 평가에 매우 인색했다. 그가 지식인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이 책을 썼다는 표지인지도 모른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를 실천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저자는 그 때나 지금이나 '진보적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기회주의적 보수주의자'다.

최근에 또 다른 정치인이 쓴 책을 읽었다. 표제는 <한국의 내일을 말하다>. 저자는 17대 총선에서 낙선했다가 네 해 만에 국회로 돌아온 3선의원이다. 그는 낙선 이후 미국에 얼마간 머무르며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지역학을 공부했는데, 그 때 이런저런 세미나에서 발표한 발제문들도 끼어 있다. 이 책 텍스트의 전부가 토씨 하나까지 저자의 손가락 끝에서 나왔다는 확신은 없다.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 이후 사정까지 다루고 있는 걸 보면, 아마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으리라.

그러나 나는 이 책의 저자가 표지에 이름이 박힌 바로 그 사람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 책을 쓰며 그가 주변에서 받은 도움이 (있었다고 해도) 그리 크지는 않았으리라는 확신이 있다는 뜻이다. 우선 이 책은 그가 정치활동을 하며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한반도와 동북아의 갈등 해소를 꾀하는 데 텍스트의 반 이상을 배당하고 있다.

나머지는 작년부터 한국인 대부분의 관심사가 된 신자유주의와 한-미 FTA에 대한 견해의 피력이다. 저자가 직업적 국제정치학자나 경제학자가 아니어서 서술이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외려 그 점이 더 미덥다. (그 꺼끌꺼끌한 문장들은 한국 법조인들의 악명 높은 글 솜씨를 연상시킨다. 이 책의 저자는 법조인 출신이다).

한국 리버럴리즘의 최대치

참여정부 다섯 해를 거치면서, 이 책 저자와 가까운 정파에 대해 나는 지지를 철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의 논지엔 대체로 수긍이 간다. 그것은 한국의 '리버럴한' 정치인이 지닐 수 있는 전망의 최대치를 드러내고 있다. 궁리와 공부를 통해 책으로 자신의 비전을 널리 털어놓는 관습이 다른 정치인들에게도 퍼졌으면 좋겠다.
[출처] [고종석 칼럼] 정치인의 책 쓰기|작성자 추미애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