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 공간 감상 후기>
개인적으로 대안에 대해 정의하자면 대안은 하나의 흐름에 대한 반항적 제시라고 생각한다. 대안공간이라고 했을 때 대안공간은 기존공간에 대한 새로운 제시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머리가 커진 후 갤러리라는 곳을 가본 적이 없다. 때문에 대안이라고 제시된 것들이 어떤 의미에서 대안인지 알지 못한다. 게다가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지식이 따로 없었다. 이런 저런 걱정 속에 차일피일 미루던 끝에 도착한 브레인팩토리는 첫인상부터 충격이었다.
갤러리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흰 벽에 그림이 붙어있고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이다. 그러나 브래인팩토리는 옆 귀퉁이에 있던 구멍가게 크기만 한 공간이었다. 약간 조악한 팻말을 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복학생 같은 사람이(미안합니다. 리혁종씨)어느 남녀에게 작품의 가격과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림은 하나도 없었고 조각으로만 전시된 갤러리는 흡사 골동품 가게를 보는 듯 했다.
세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나는 공간 전체를 금세 둘러다 보았다. 하지만 도저히 이걸 왜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본주의shop이라는 제목 속에서 사고를 해보았다. 그래도 떠오르는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당황해 하던 찰나에 작품을 사려는 남녀가 나갔다. 봐봤자 뭔지 모르겠고 이야기나 한번 해보겠다는 생각에 아까 설명하려던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 걸었던 말은 “여기서 작품도 파나 봐요.” 였다. 이때까지도 이 사람이 화가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말을 듣자 리혁종씨는 작품 판매의 의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처음 자본주의shop 이라고 알았던 제목은 사실 마이너스 자본주의였고 이 안에 작품 판매의 의미도 들어있었던 것이다. 본의 아니게 인터뷰 형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작품에 대한 열의와 확신으로 가득한 리혁종씨는 화가이기 이전에 솜씨 좋은 이야기꾼이었다.
전체적인 작업의 의미에서부터 마이너스 자본주의 샵의 의미등 작가의 이야기는 쉴 새 없었다. 그냥 보기 좋게 깎아놓은 듯 한 작품에 들어있는 이야기는 상당히 심오했다. 경제에서부터 철학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던 찰나 그래도 스스로 한번 들러봐야겠다는 생각에 한번 둘러보겠다고 말했다. 리혁종씨는 더 설명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듯 했다.
처음에는 모호하기만 했던 작품들이었지만 화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새롭게 의미가 다가오는 듯 했다. 거기에다 프린트에 써진 글들과 작품에 대해 설명해놓은 글들을 보고 직접 가서 보며 감상하니 작품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또 보다가 이해가 안가거나 재미있는 점이 있으면 리혁종씨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이에 대해 화가는 하나하나 세심하게 설명을 거듭 해주었다. 이야기는 작품 밖에서도 이루어져 자신의 최근 근황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기도 했고 나중에 15일날 하는 파티에도 오라고 제의도 받았다. 보던 중 커피도 한잔 주셨다. 이야깃거리가 많을 것 같은 제목이라 선택한 곳이었는데, 제목 말고도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유쾌했던 두시간 반이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미술관이랑은 상당히 달랐지만 여러 설명을 통해서 작품에 대해 감상하고 즐겁게 돌아올 수 있었다. 여자 친구가 앤디워홀 전시회가자고 했으나 결국 못 갔다. 그동안 미술과 전시회에 대한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번 방문을 통해 갤러리에 대한 생각을 많이 바꿀 수 있었다. 이 수업이 끝난 후에도 이야기 거리가 많을 것 같은 전시회라면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 리혁종씨같은 친절한 화가를 만나면 더더욱 좋겠다. 이는 어떻게든 내 삶을 풍요롭게 해줄 것같다.
<작품 감상>
자본주의 아래 모든 것은 상품성을 띈다. 어떤 물건이든 시장에 의해 가격이 매겨지고 그것은 어떤 것으로 교환가능하다. 미술작품을 예로 들면 미술은 감상이 가능한 심미적 가치와 함께 교환이 가능한 교환가치를 가진다. 반 고흐의 작품이 300이라고 할 경우, 그의 작품은 반 고흐의 노동 가치와 심미적 감상의 가치, 희소성 등이 매겨져 300억이 되는 것이다. 동시에 반 고흐의 작품은 무명화가의 작품의 몇 백 개의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틀에 대해 화가가 의문을 가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유재산의 틀을 공격하고, 환경을 생각하며 스스로 자급자족한다. 그 틀 안에서 틀을 해체해나간다. 그것은 가능한 일인가? 이 어려운 질문 속에 리혁종의 작업이 있다.
그에게 상업적인 것과 생태적인 것은 절충점을 찾아야 할 무엇이다. 그는 철저히 상업적으로 자본주의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고 , 동시에 극단적인 생태적인 입장도 거부한다. 그것은 ‘비자본적인 방법’으로 자본을 유입하겠다는 계획으로 이어진다.
그의 작품은 주변에서 버려진 나뭇조각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감 , 석고 등 환경을 파괴하는 재료를 배제한 채 자연 속에서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그의 모든 작품은 작가의 자연에 대한, 경제에 대한 고뇌가 녹아 있다.
<아키루스-목숨을 건 도약>의 경우 작품의 주제는 신화적으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숨어있는 메시지는 철저히 경제적이다. <자본론>에서 물건이 팔릴 리 모른 채 팔릴 것이라는 믿음으로 물건을 만든다는 것을 ‘목숨을 건 도약’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그 메시지를 넘어 화가의 소망이 묻어있다. 아키루스처럼 높이만 날아가다 날개가 불타지 않고, 자본과 급진적 생태주의 사이를 영리하게 비행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있는 것이다. 이렇듯 그의 작품은 경제와 생태에 대한 고민과 성찰 속에서 조각되어진다.
<그대가 나의 간을 파먹을 지라도>의 경우 나뭇조각에 새겨진 여자의 간 부분이 비어있다. 그런데 이것은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깎다보니 안에 벌레가 파먹은 부분이었다. 그는 이 자연의 의도를 없애는 대신 남겨놓았다. 인간이 자연을 파먹었으니 자연이 인간(의 작품)을 파먹을 지라도 괜찮다는 것일까
이러한 자본에 대한 경고와 자연에 대한 메세지는 <타이타닉 석유문명>에서 더욱 강렬해진다. <타이타닉 석유문명>의 경우 거대한 배에 공룡이 모닥불 옆에 서 있다. 결국 파멸로 치달을 에너지 낭비를 침몰과 멸망의 아이콘으로 표현한 작가의 기지가 훌륭했다. 그는 문 앞에 가격표를 달아놓을 만큼 자본적이지만 동시에 그것에 대해 경고를 한다. 이러한 자본에 대한 조롱은 작품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이어진다.
이 작품은 상당히 재미있다. 저울을 든 정의의 여신상이 눈을 가리고 있고 뒤에 한 손이 여신상의 가슴을 애무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믿은 고전경제학에 대한 조롱과 현재의 사회가 겹쳐보였다. 신문에서는 이건희의 경영복귀에 대한 찬양으로 시끄러웠던 때다.
작품 <像>의 경우 작품보다 그 안에 담긴 작가의 말이 더 가슴속에 와 닿았다. 자신의 작업은 ‘인간의 계획에 환경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상황에 상응하여 수정하는 과정’이라는 표현은 그의 작업 전체를 이해하게 해주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코끼리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탄생>의 경우 ‘걷고 싶은 거리’ 공사장에서 발견한 나무뿌리로 만든 작품이다. 디자인 서울이라면서 오세훈이 온 서울을 헤집고 있을 때 화가는 그 안에서 작품을 만들어 냈다. 오세훈과 화가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한명은 자연을 파괴하고 거기에 생태와 디자인이란 이름을 붙이고 있고, 다른 한명은 자연 그대로에 예술이란 이름을 붙이고 있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동물로 뱀을 감고 다니는 독수리를 이야기 했다. 니체는 독수리의 드높은 긍지를 닮으면서도 뱀처럼 현실에서 가장 영리하게 생활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리혁종을 보면서 그 동물이 떠올랐다. 그는 삶을 도망가지도 않고 긍지도 꺾지 않은 채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비자본 적인 방법으로 과연 자본을 유입할 수 있을까. 그가 주장하는 아키루스 프로젝트처럼 작품을 팔아서 공동체를 위해 자본을 쓰고 소작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성공할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것이 금지된 것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때 그의 상상은 위험하지만 다분히 예술적이다. 물론 그 위험이 그의 날개를 태울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를 바다에서 구조하고 싶다. 점점 인간을 소외하고 자연을 소외하는 시대에 이런 예술가 하나쯤은 남겨놔야 할 것 같다.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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