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3일 토요일

문화상대주의라는 도덕과 자민족중심주의라는 악덕

  예전 한 교양 수업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의 일이다. 주제에 따라 자료를 수집하고 토의과정을 거쳤는데, 순조롭게 진행되던 프로젝트는 정작 프리젠테이션을 제작하다 난관에 부딪혔다. 만들다 보니 우리의 주제는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는 주제였던 것이다. 발표주제는 <문화제국주의와 한류의 활성방안>이었다.

 할리우드로 대변되는 문화의 침투는 보호제도로 막고, 우리의 문화는 상품화해서 팔자. 이는 자국의 보호무역은 강화하면서 자유무역을 부르짖는 것처럼 우스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우리는 전체적인 틀은 바꾸지 않고 문화적 힘의 크기를 이유로 논지를 폈다. 이는 학생들 사이에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고 발표는 무사히 끝났다.

 그 당시에는 발표를 끝낸 기쁨에 깊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상당히 우스운 이야기다. 학생들과 나는 수용자의 입장에선 문화상대주의를 지지하고 , 전파자의 입장에선 자민족 중심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 동시에 우리는 이성적으로는 문화상대주의를 지지하고 있었지만 감성적으로는 자문화중심주의 안에 있었다. 타문화에 대한 존중은 당연하지만 감성적으로는 붉은 악마의 대한민국이었던 것이다.

 앞의 일례는 문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자기모순을 보여준다. 동시에 혼란스러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교류와 침략, 자긍심과 배타성의 경계는 어디인가? 글로벌 시대에 우리는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만약 우리가 자가당착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어느 편에 서 있어야하는 것일까?

 위의 문제에 답을 하기위해서 한 개인이든 민족이든 답해야하는 것은 문화를 보는 관점이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주로 우익들이 주장하는 자문화중심주의, 혹은 민족패권주의다. 이는 자기 문화의 보편성 또는 우수성을 주장한다. 반면 문화상대주의의 경우는 인간의 보편적 삶에 반하는 (살인, 식인)것이 아닌 이상 각 문화의 상대성을 인정한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볼 때 문화의 상대성이 인정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각나라의 문화는 항상 그 나라의 힘만큼 인정되어왔다.‘약소국에 외교란 없다.’는 중국수석의 말을 빌리자면 약소국에 문화란 없었다. 문화는 힘의 균형만큼만 상대성을 인정받았고 민족 공동체 대부분은 자문화 중심적으로 사고했다.

 그런데 이런 자문화에 대한 긍지는 곧잘 타문화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나곤 했다. 알렉산더나 징기스칸 같은 침략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근대 서구 식민지 경쟁 등은 모두 자기 문화의 우월성을 근거로 이루어졌다. 

 그러던 중 인류는 자문화중심주의의 최악을 경험하게 된다. 전쟁배상금등으로 경제, 사회혼란을 겪던 독일국민들은 나치의 게르만 단결이라는 구호 앞에 모였다. 그들은 그 긍지를 바탕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유태인 인종말살에 동참한다. 이는 2차 세계대전과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인종 학살을 가져왔다. 

 이 역사적 상흔을 통해 겨우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문화의 상대성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며 자신들의 이성과 기술을 뽐내던 서구의 종착역은 전쟁과 허무였다. 나차라는 정신병적 민족주의를 겪고 나서야 문화의 상대성을 사고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대성의 인정은 역사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모든 자민족 중심적 사고는 항상 타민족에 대한 침략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성은 결국 정당성만 얻은 채 작동하지는 않고 있다. 나치의 인종청소를 겪은 유태인들은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고 있다. 세계의 종교분쟁은 날이 갈수록 맹위를 떨치고 있으며 , 미국의 문화패권주의도 나날이 힘을 더 하고 있는 중이다. 뉴스에서는 러시아 스킨헤드의 유학생 공격이 이슈가 되고 있다. 타문화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사라진채 역사는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국내라고 예외는 아니다.  김지하는 2005년 산문집 『생명과 평화의 길』에서 동북화 문화공동체를 주장했다. 김지하는 세계적 문화대혁명이 한반도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혁명은 한국의 신세대와 지식인들에 의해 아시아 전 민족들과 함께 시도되고 아시아 고대 문   예 부흥으로부터 촉발될 것이며 이 부흥은 이미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의 역사적 대응으       로부터 촉발되기 시작하였다.”(생명과 평화의 길 254쪽)(월간 말 재인용)


 이에 대해 우석훈은 김지하를 바그너에 비교하며 김지하의 주장은 나치의 그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그의 문화에 대한 자긍심은 하나의 틀을 제공했지만 우석훈이 보기에 그것은 타문화에 대한 침략이었다. 그가 말하는 생명 공동체는 한민족의 생명공동체이다. 그리고 그가 생각한 문화공동체가 사회를 읽은 혜안이든 의지이든 간에 그것의 보편성을 운운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북공정의 야만성을 그는 똑같이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생들, 그리고 국민들은 김지하와 다를까? 스킨헤드를 욕하는 우리에게 동남아사람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은 쌍욕이다. 우리는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에게 우월성을 부여함으로써 타인을 소외시킨다. 그 소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억압으로 변모하곤 한다. 문화에 대한 이기적 시선이 폭력을 불러오는 것이다.

 문화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되풀이되고 전승되는 생활양식’이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삶을 영위하기 위해’이다. 동물을 바라보았을 때 오리에게는 오리의 생활방식이 있다. 매에게는 매의 생활 방식이 있으며, 뻐꾸기에게는 뻐꾸기의 생활방식이 있다. 같은 조류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다른 생활 방식을 꾸려나간다.  

 인간의 문화도 이와 같다. 사람들에게 처한 조건은 각기 다르다. 그 조건에 맞는 생활양식이 같을 수는 없다. 때문에 문화의 보편성을 따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런 보편성에 입각한 자기중심적 사고를 통해 인류는 수없이 폭력이란 오류를 쌓아왔다.

 문화의 상대성은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이며 도덕이다. 도덕이기 때문에 당위이며 실천해야하는 명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조금만 관점을 바꾸면 가능한 일이다.  

 지금껏 문화를 보는 관점에 있어서 역사는 진보하기보다 반복되어져 왔다. 그러나 잠깐만 관점을 바꾸어보자. 생각을 바꿈으로서 우리는 폭력이란 지긋지긋한 반복을 경감시킬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찾을지도 모른다.


문화인류학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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