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3일 토요일

미래학이란 무엇일까?

-미래학에 대한 정의……라기보단 생각-

 마광수는 광마잡담에서 미래에는 자유의지가 없는 성애로봇이 나오고 쾌락지상주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했다. 마르크스는 미래의 노동은 놀이가 될 것이라고 했으며, 박경철은 추격성장의 시대가 가고 선도 성장의 시대가 올 것이라 했다. 공병호씨는 십년 후의 한국에 대해 책을 썼으며, 가십TV에서는 올 여름 패션트렌드에 대해 방송을 하고 있다. 

 나는 미래학이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다 소위 미래학자란 사람들이 누구인가 떠올려보았다.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라고는 피터 드러커 정도였는데 그도 직업은 컨설턴트였던 사람이다. 위의 사람들을 보며 나는 미래학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내렸는데, 미래학이란 각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의 지식을 토대로 그럴듯하게 예측을 설명해놓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미래학이란 모든 전문영역이 마지막으로 도달해야할 종착역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가하면 정의가 아닌 특성적인 면으로 접근할 때 미래학이란 누군가의 계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미래학을 계획과 같은 것으로 볼 때 우리는 미래학의 특성에 대해 몇 가지 알아볼 수 있다.

 첫째로 예측 속에 있는 당위와 현실과의 괴리이다. 가령 나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월요일 아침이 되면 일주일 계획을 세우곤 한다. 숙제들이 있으면 며칠까지 숙제들 기한을 세워놓기도 하고 공부를 하기 위해 시간을 비워놓기도 한다. 내 시간 리듬에 맞추어 볼 때 생각하기 어려운 것들은 생각하지 않고 이것저것 배열해 놓는다. 여기서 나는 내 스스로에 대한 전문가이다.

 그런데 막상 맞닥뜨린 현실은 계획대로 흘러가주지 않는다. 책을 보다 지겨워 게임에 몇 시간 빠지는가 하면 친한 친구가 술 먹자고 부르기도 한다. 일주일 안 본 여자 친구의 기분은 예상 밖이고 숙제의 진척도 예상 밖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당위에도 불과하고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주지 않는다.

 둘째는 필연적인 예측 불가능성이다. 나비효과란 단어로 널리 알려진 카오스이론은 ‘초기조건의 민감한 의존성에 따른 미래결과의 예측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나는 내 여자 친구와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다. 사실 만난 것도 설명하려면 끝이 없다. 그 인과의 초기조건은 내 이성적 능력의 밖이다. 

 그렇다면 왜 어차피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배우겠답시고 이 수업을 듣고 있을까. 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불안을 꼽고 싶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불안의 ‘신호적 기능’을 중요시하며 그것을 생물학적 적응 과정으로 본다. 그런 관점으로 볼 때 불안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직 완전히 인식되지 않는 요인들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커대한 흐름에 대한 불안을 떨쳐보고자 미래학이란 정보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안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미래는 알 수 있을까? 당장 4개월 후에 나는 이 수업의 A학점을 맞아서 나갈까? 모르겠다. 그렇다면 누가 와서 영상으로 다 보여준다고 하면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진짜 권태로울 듯싶다. 

  불안 속에서 나는 이 수업을 들어나간다. 그리고 권태보다는 불안이 나은 듯하다. 불안 덕분에 미래학이란 학문을 익히고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결과가 불안하지만 과정을 즐기는 것 그것이 지금을 살아가고 미래를 살아내는 자세가 아닐까?



- 3 월 31 일 미래학 수업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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