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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8일 수요일

불안의 정체

 요 며칠간 알 수 없는 불안감 속에 어쩔 줄 몰랐다. 어쩔 줄 몰랐다고 해도 무슨 특이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갔을 뿐이다. 하지만 몸에 흐르는 이 불안 속에서 무엇하나 몰입하기도 힘들었고, 모든 일에 확신이 사라져갔다.  
 그러던 중 다시금 계획이나 짜봐야겠다 싶어 공책을 들고 앞으로의 계획을 짰다. 한 6개월 정도로 잡아놓고 돈과 걸리는 시간등에 대해 이리저리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그러다 어느 한 곳에 이르러서 잠시 잊었던 그 불안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 직업과 삶의 방향에 대한 것이었다.            
 왜 나는 이 대목에서 상당한 불안감과 마주했을까 궁금했다. 알바를 구하고 학자금 이자 얼마내고 하는 한달의 지출을 정하고 할 때는 전혀 느끼지 않았던 이 불안감. 그 불안감을 곰곰히 생각해보던 중에 나는 이 불안이 내 얼마나 황당한 바램속에 있었던 것인가 깨닫게 되었다.  
 예를 들어보자, 알바를 구하고 한달 얼마 쓰겠다는 것은 내 계획의 영역이다. 그조차도 알고보면 많은 불확실성에 휩쌓여있는 것이지만 적어도 그 불확실성은 내가 감당할 만 한 수준이다. 그러나 내 삶의 방향과 내 꿈에 이르러서는 그 불확실성이 상상이상으로 불어난다. 결국 내 불안이란 그 불확실성을 감당하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었는데 이게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소리란 말인가.
 이 인정투쟁의 장인 세상속에서 과연 내가 가치의 투쟁에서 이길지 질지 어떻게 알수 있을까. 내 인생의 방향을 내가 어떻게 지레짐작할 수 있단 말인가. 또 그 과정조차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그 결과를 못본다고 불안해한다는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나는 황당하게도 내 삶의 모든 일들을 보지 못해서 불안해하고 있었다. 사실 그 모습들을 다 본다면 여태까지 겪은 불안의 곱절만큼 권태에 휩쌓일지 모르고 난 도저히 살 수 없을지 모른다.  
 
 난 뽑기(방향)를 정하고 뽑기에 동전(노력)을 넣을 수는 있다. 그러나 뽑기에서 뭐가 나올지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신이란 변덕쟁이의 영역이다. 난 동전이나 열심히 넣어봐야겠다. 무엇이 나올까 걱정하기 보다는 무엇이 나올까 설레이는게 좋을지 모르겠다.

 잡담: 저와 같은 불안에 떠는 분들을 위해 한 영화감독의 좌우명(샘터에서 봤던가 가물)을 올려놓습니다.                      

 아님말구

2009년 7월 2일 목요일

불꽃남자 동욱이형을 기억하며


  동욱이형을 처음 봤던 때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 같은 소대도 아니었고, 워낙 찌글찌글(계급이 낮다는 표현)할 때라서 옆 소대 후임따위는 신경쓸 겨를도 없었으니까. 그때는 나 하나 건사하는데 정신이 없는 때였다.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면 먼저 필승하길래 아 내 후임이구나 하고 알아차린 정도, 같은 소대가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이 될 때까지 관심도 안 가졌었다.   
 하지만 복도에서 필승을 외치는 동욱이형은 묘한 분위기의 사람이었다. 모든 걸 받아줄 것 같은 푸근하고 선량한 눈, 약간 이국적인 얼굴 , 큰 키  목소리는 그다지 힘이 없었지만 부드러웠다. 왜 그런가 하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는데 고참들이 중대 본부 애들 이야기를 듣고 와서 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군대를 1학년 혹은 2학년 중간에 가지만 나는 학보사 활동때문에 23살에야 군대를 입대했다. 선임중에도 22살짜리 애들이 즐비했고 병장들이 나랑 나이가 비슷하곤 했다. 그런데 동욱이형은 나보다 두 살 많은 25살이었다. 왜 그렇게 나이가 많은 가 했더니 대학을 두번 들어가서 라고 했다.   
 동욱이형은 원래 서울대 공대에 다니고 있었다 . 그러다가 신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광주에 있는 신학대학으로 다시 입학하고 학년을 다닌 후 군대에 온 것이었다.  
 최전방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소위 SKY 대학에 나온 아이들은 일반 보병중대에 떨어지지 않고 본부중대 보직을 받는다. 우리 중대에서 가장 학벌이 좋았던 아이는 한양대 다니는 내 동기였다. 생각해보면 그 형이 공대를 계속 다니고 있었다면 이 빡센 보병중대에 올 일은 애시당초 없었다.     
 후에 내 머리가 만들어낸 이미지인지 모르지만 가물가물하게 훈련때 형의 모습을 본 적도 있는 것같다. 정말 가파른 대성산 길들, 철원의 살인적인 더위. 안경 속 땀방울과 함께 헉헉 거렸던 걸로 기억한다. 뭐 훈련 때 뿐일까. 같은 중대니 진지공사며 이런저런 때도 많이 스쳤을 것이다. 그러다가 좀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은 지뢰에 철심까는 작업때였다.  
 그때 무슨 협정이 바뀌었다고 지뢰도 지뢰탐지기에 걸리게 철심을 하나씩 넣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세계에서 지뢰때문에 목숨을 잃는 아이들이 상당하다고 한다. 탄약 반장이 데리고 다니는 작업은 정말 모하니면 도였는데 정말 땡보(무진장 편하다는 표현)일 때도 있는가 하면 무진장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그때는 시간은 좀 걸렸지만 설렁 설렁하는 작업이라 동욱이형이랑 대화할 시간이 좀 있었다.                   
 사실 그때 거창한 이야기 없이 그냥 종교에 대해 이리저리 이야기했던 것같다. (왜 사람의 기억은 대부분이 뿌연 이미지일까 답답하다.) 아는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 밖에 없어서 그런 것도 공부하고 그러냐고 물으니 자기 학년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했던 걸로 기억한다. 군대에서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났지만 , 동욱이형도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뭔가 신념에 꽉찬 사람. 그러면서 부드러운 사람이랄까?           
 그런 시작과 중간을 보내고 근무지 변경으로 소대가 갈린 뒤 한참 못 보다가 다시 만난 것은 GOP에서 였다. 1소대와 2소대는 바로 옆에 건물을 쓰는 까닭에 밥 먹을 때도 보고 얼굴 볼 일이 많았다.  동욱이형과의 시작과 중간은 가물가물하지만 끝은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 후의 일때문에 형이 나에게 큰 의미가 되서인지는 모른다.
 GOP는  두 소대가 붙어있지만 쓰레기 처리하는 곳은 한 곳이다. 그런데 우리 소대에 비해서 2소대 아이들이 분리수거를 안한다고 불만이 컸다. 그것 때문에 이야기를 하러 갔었는데 그 때 동욱이형이 있었다. 형에게 소대 쓰레기좀 잘 처리하라고 볼멘소리를 했었는데 후임들 앞이라 좀 그랬을 텐데도 불구하고 이제부터 잘 하겠다고 했다. (당연한 것같지만 원래 후임들 많은 곳에서 대놓고 혼내면 안된다. 자존심을 뭉개는 행위다.) 형은 화를 내는 경우가 없었다. 그리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깨끗이 인정했다. 그리고 그 후 형을 보지 못했다.
 군대에서 대부분 작업을 할 때 휴식시간이 되면 그냥 땅바닥에 주저앉곤 한다. 하지만 그 곳에 쥐똥이나 온갖 더러운 것이 많다. 특히 쥐똥같은 것이 있으면 유행성 출혈열이 걸릴 수 있는데 치사율이 40프로가 넘는다.
 상황실에서 (본부 소대라 GOP에서는 상황실에서 근무한다.) 휴가를 나간 동욱이형이 많이 아프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 많이 아프다는게 얼마나 아픈지 몰랐다. 뚱보 중대장의 굳은 표정에서 좀 심각성을 느낄 수 있었을 뿐. 하지만 이틀날 누구도 직접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조용히 형의 소식은 전 중대에 퍼졌다. 항상 야간근무 잡담으로 하루 하루를 때우던 그 때, 그 날은 아이들 다 말이 없었다. 나는 그냥 공책을 피고 기억안 날 말들을 끄적이며 아침을 맞았다.           
  가까이 생활하던 사람의 죽음을 별로 본 적이 없던 나는 혼란스러웠다, 신은 무엇일까? 신의 뜻은 무엇일까? 신은 동욱이형이 믿던 성경에서 처럼 도덕적인 존재일까? 과연  인간의 도덕과 신의 도덕은 상관이 있는 것일까? 동욱이형을 데려가는 것. 그것은 단지 불편부당한 것인가?   신은 정말 미울정도로 철저히 가치중립적인 것은 아닐까? 왜 대대 연대 사단에서 가장 순수한 영혼을 데려갈까? 그것이 신의 뜻일까?        
 형의 선택은 옳은 것이었을까? 결과로 봐야는 걸까? 과정으로 봐야는 걸까? 신부는 슬퍼하며 동욱이형은 천국에서 영생의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할까?   형이 서울대 공대생으로 남아있었다면 과연 죽었을까? 형은 행복했을까? 형이 사라진 지금 형의 행복을 말 할 수 있는 걸까? 불교신자이지만 좋은 업만 쌓아온 형이 윤회의 법칙속에 가야하는 이유는 또 뭘까.
 
 그 무엇도 답 할 수 없었다.

형의 죽음도 어느새 흩어져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얼마 후 나는 제대했다. 생각해보면 형도 군생활 2개월 정도 남은 무렵의 일이었다.
 이 밤 밑도 끝도 없이 형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때의 질문도 떠올랐다. 어차피 다 답은 못했지만...
갑자기 쥐가 생각나서 그런지 누구 생일날이어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다.흠.                                        
이 순간 말할 수 있는 건 형은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 그정도? 흠.
 
어! 쩄! 든!


   스물 여섯의 김동욱은 불꽃남자였다!
   형을 잊지 않겠어!  

          

2009년 7월 1일 수요일

조선일보와 함께보는 장자연 사건

예전에 같이 영자신문 다니던 놈이 조선일보 다니는 어느 여기자를 만난 일이 있다.(왜 만났는지는 모름) 그 떄 그 여기자분은  "조선일보 기자면 뿔 달린 줄 알았죠? "라고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그냥  놀리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대학 신문들에게 비춰진 자신들의 모습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겐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혹시 사회에 비춰진 자신들의 모습도 대충은 자각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순진한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 때 그 분은 그냥 놀리신게 분명한 듯 싶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좀 의식한다면 대체 이런 행보를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
법원·검찰·경찰

경찰 중간발표 "조선일보 특정 임원 장자연 사건 무관…모든 사안 관련성 없어 무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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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조선 닷컴 홈페이지를 들어가보니 대문짝 하게 기사가 펼쳐져 있었다. 그동안 혐의속에 묶여있던 조선일보사로서는 정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한겨레 독자나 한토마 들어오시는 분들은 곧이 곧대로 믿으시는 분은 별로 없으실 것이다. 세상 뭐 그렇지 힘있고 봐야지  ㅆㅂ 정도 내 뱉으실 듯 싶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일보 구독자도 수사결과를 별로 안 믿을거같다는 것이다,

사회
종합

"당시 성(性)상납 수사때 엄청난 외압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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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4.16 02:39 / 수정 : 2009.04.16 09:4

 
조선일보 4월 16일
 처음엔 한겨레가 쓴 기사인줄 알았다. 자기 언론사 대표가 혐의를 받고 있는 마당에  2002 년 성 상납 수사시 엄청난 외압이 있었다는 걸 보도한다는 건, 검찰의 안일한 수사태도를 압박하는 것일까? 아니면 저번에도 저렇게 대충끝났으니 이번에도 대충 끝날 것이다 라는 암시일까? 왠지 조선일보의 그동안의 행태로 봐선 두번째가 사리에 맞지만 만약 아니라면 이 달의 기자상은 한현우 기자님께!
 그러나 문제는 의혹 덕지 덕지 붙은 중간 수사 발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분들은 며칠전 이종걸 이종희 의원을 고소했기 때문,  그렇게 폭넣게 이리저리 욕(그러니까 비판)을 하시는 분들이 그 폭만큼의 비판을 받아들으시지 못하는 것도 쪼잔해 보이지만 기막힌 것은 이분들이 하시는 소리들이다.
정치
종합

본사(本社), 이종걸·이정희 의원 등 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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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사는 고소장에서 "본사 임원은 장씨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는데도 이종걸 의원은 지난 6일 국회 대정부 질문을 통해 '장자연 리스트' 내용을 언급하면서 본사 특정 임원이 장씨 사건에 관련된 것처럼 이야기해 본사와 본사 특정 임원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밝혔다.-본문 내용 중-
 
 여기서 조선일보는 "전혀 관련이 없는데도"라고 했다.

강희락 "장자연 리스트에 <조선>간부 들어있다"

"리스트 중 6명은 모처에서 조사…3명은 접촉 중"

기사입력 2009-04-13 오후 4:3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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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4월 13일자
 
 정말 진중권 교수 말마따라 장자연씨가 안티 조선 하려고 목숨을 끊으신 것은 아닐텐데, 리스트에 버젓히 올라가 있는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관련없다고 하시며 명예훼손을 청구하신다. 이분들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가해자의 행태로 봐서는 당연히 조용히 있으실줄 알았지만 이들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태도가 돌변하셨다.
 김대중 고문은 칼럼에서 "조선일보의 입장에서 보면 경찰도, 어떤 의미에서는 정권도 이 '장자연 사건'의 진행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당국의 무능과 무력, 또는 관음증(?)이 사태의 '주연' 같고, 일부 '안티 조선'의 조바심이 '조연'처럼 보였다." 라고 하셨다.
  피해 망상도 이정도 되면 병일 듯한데 우스운 것은 관음증(?) 이란 대목이다. 조선일보는 얼마전에 연쇄 살인범 강호순 사건에서 화끈하게 사회적 관음증의 해소에 일조하지 않으셨나? 역시 내가 하면 스캔들이고 남이 하면 로맨스인 것일까? 같은 알 권리 라지만 내가 생각하는 알 권리와 조선일보가 생각하는 알 권리는 다른 듯 싶다. 정확히 말하자면 맞았다 달랐다 하는 것일테다. 명예훼손 운운하기 전에 자기들 행태나 다시 뒤돌아봐야하지않을까?
요즘 들어 아는게 병이라는 사실을 곱씹어보게 된다. 다들 "그럴껄" 하던 사실이 요즘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펼쳐진다.'경찰 청장은 룸 안가냐 다 저것도 큰 놈들오면 접대할걸 '다 로비질 하는거아냐 신인애들 팔고, 아마 그럴걸'  '저거 앵커 가만 둘거같냐 자를걸' 순대국밥집에서의 아저씨들의 호언장담 이야기들 혹은 커피숍에서 여자애들 사이에 도는 출처가 꼭 있는 연예계 뒷이이야기들.  분명 다들 그럴걸 하고 공공연하게 아는 사실인데도 막상 사실을 알면 빈 속에 커피 넣는것 마냥 씁쓸하다.
 개인적으로 조선일보 임원이 이 사건에 무관했으면 한다. 그래야 사실 뿔은 안 달렸구나 하고 믿을 테니까. 하지만 문건에 나온대로 정말로 그랬으면......................

asdasdsa.jpg

죽는다 진짜.



예전 한토마에 올렸던 글인데 김대표란 놈이 잡혀와서 블로그에도  올려본다. 강희락 경찰청장처럼 기자들에게 모텔키 쥐어준 경험이 있으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돈으로 창녀촌 드나들어본 경험이 있으면 이해 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사회 분위기 자체가 좀 역겹다.

2009년 6월 30일 화요일

[감상문]희망의 인문학을 읽고


 희망의 인문학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를 읽고,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를 만났을 때의 이야기이다. 천하를 다스리는 대왕이었던 알렉산더는 행색이 거지꼴인 디오게네스에게 필요한 것을 말하면 들어주겠다고 한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그럼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고 하고, 이에 알렉산더는 감탄하며 자기가 알렉산더가 아니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한다. 여기서 디오게네스는 빈자가 아니라 대왕도 부러워할 만한 부를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여기 록펠러처럼 당신을 부유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사람이 있다. 요즘 TV 신문, 책에 판을 치는 얼치기 희망 약장수일까? 그는 계속 말한다. “ 아니 어쩌면 여러분은 록펠러보다 더 큰 부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록펠러 집안 사람들이라 해서 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아닐테니까요. 앞으로 인문학을 공부하면 여러분은 ‘부’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며, 여러분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이 황당한 공상가의 말은 곧이 믿을 만한 것일까? 그러나 그 곳에서 하나의 기적이 시작된다.  
 이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접하게 된 건 1년전 쯤이다 월간 샘터 기획 코너중 하나에 노숙자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성 프란시스 대학의 사연이 실렸는데, 이 이야기를 본 나는 적잖은 충격에 휩쌓였다. 가장 빈곤한 사람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당연히 빵이고 훈련일줄 알았는데 , 정작 그들이 목말라 하던 것은 인문학, 생각하는 감성이었던 것이다. 인문학과이면서도 한번도 대수롭게 생각한 적이 없었던, 그리고 힘이 되는지도 몰랐던 인문학이 이들에게 그렇게 필요한 것이었다니 놀랍다 못해 당황스러웠다. 이 이야기를 보고 관련된 이것저것 찾아보다보니 클레멘트 코스에 대해 알게 되었고, 자주가는 중구 유락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 학자의 생각이 실천의지를 만나 현실에 반응하는 모습은 담담한 서술에도 불과하고 충분히 감동적이다. 그리고 한 학자의 따듯한 시선과 의지에서 나왔지만 그 실현에는 극적인 일련의 사건들과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 있다.
 그가 이 코스의 영감을 받은 것은 한 여 재소자와의 대화에서 이다. 여재소자에게 “왜 사람들이 가난한 것같나요.”라고 물은 얼 쇼리스는 전혀 생각치 못한 대답을 듣는다.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얼선생님 그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이에 얼쇼리스는 그 대답이 가진 의미를 생각해본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이 왜 가난한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이어지게 된다.
 희망의 인문학에서 얼쇼리스는 빈곤에 대한 정의부터 새로 시작하고, 수치로 따지는 절대적 빈곤보다 훨씬 더 무서운 상대적 빈곤의 모습에 대해 분석한다. 상대적 빈곤은 경제란 지배규칙에서 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존중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꽃인 광고는 사람들에게 욕망을 심는 대신 박탈감을 가져오며 가능성이란 신기루는 그들의 삶을 더 비참하게 한다. 공정한 게임으로 보이는 이 게임은 사실 전혀 공정하지 않다. 차라리 칼뱅주의자들의 생각대로 성공한 사람들은 하늘이 선택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더 편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는 빈민들을 빈자로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하나의 키워드를 떠올린다. 그것은 바로 무력이다.
  도시빈민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무력’이다. 이 무력의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경제란 경주에서 진 패배감, 소외이기도 하고, 국가 권력(정당성을 가진 것이나, 이들에게는 정치성이 없으므로 무력으로서만 다가온다.)이기도 하며, 시기심과 증오이기도 하다. 이 ‘무력’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서로를 향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이 무력도 확대 재생산된다.  책에선 사우스 브롱크스의 아이들의 테니스 게임 이야기가 나오는데 , 사회복지사가 분명 줄을 정했는데도 불구하고 빈민가의 아이들은 서로 하겠다고 싸우며, 이를 정하는 순서는 더 크고 힘이 세다는 무력이다.
 이 무력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얼쇼리스는 그 방법으로 훈련이 아닌 교육, 그 교육을 통한 ‘시민’의 모습을 제시한다. 이 때 그 이상적 시민의 모습은 고대 아테네의 시민들이다. 물론 빈민들도 시민권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범위에 대해서는 아테네의 그것보다 베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유는 고대 아테네 시민의 경우는 정치적 삶과 문화적 삶을 같이 향유한 반면 현대 빈민들의 경우는 두가지 다 향유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든 삶은 필요로서 규정되어질 뿐이다. 이는 시민의 공적 삶, 행동하는 삶과는 먼 모습이다. 이에 그는 인문학이란 위험한 무기를 들이민다. 인문학이란 정치적 삶으로 안내하는 하나의 영감이자 도구이다. 정치적 삶은 그들 자신만의 삶이 아닌 서로를 위한 삶의 방향을 스스로 성찰하고 결정하게 만들어준다. 그 때 만들어지는 것은 ‘무력’ 아닌 ‘힘’이다. 얼 쇼리스는 그들 스스로가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인내를 가지고 안내자의 역할을 자처한다.
 물론 이 과정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책에서 얼쇼리스는 기금 마련등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그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도 만나며, 수업 코스중 몇몇 학생들은 개인적 사정으로 중간에 그만두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문제이상으로 그를 지지하고 돕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클레멘트 코스로서 변화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목격한다. 무력의 포위망에 빠져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던 학생들이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에 대해 토론하고, 안티고네의 고뇌에 대해서 토론하며, 역사의 사건을 해체하고 성찰해본다.
[미국 혁명의 급진주의에 나타난 고든 우드의 사상]에 대한 수업중 미국혁명에서 나타난  원주민에 대한 태도에 한 학생이 의문을 던진다. “우리나라를 세운 사람들이 그렇게 인문학을 좋아했다면, 어째서 원주민들을 그런 식으로 심하게 대했을까요?” 이에 아벨이란 학생은 “그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자기 통제 불능’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잖아요.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 무언지는 알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지요. 왜냐하면 자기 욕심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라고 이야기한다. 그들 모두 자기 통제가 불가능한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 아닌가. 그런 그들이 적들의 행동을 분석하는 방법을 갖게 된 것이다.  
 “미국의 성공은 언제나 빈민들을 ‘위험하지 않은 상태’로 묶어둠으로써 가능했다.”는 얼쇼리스는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가가 빈민들을 대하는 방식은 그들을 단지 훈련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성찰할 수 있는 능력과 정치적 기술을 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 정치적 삶을 살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 남는 것은 잔치 후 남은 떡고물 뿐이며 점점 견고해지는 무력 밖에 없다. 그 무력을 해체하고 힘으로서 대응하는 방법이 정치적 삶이며 그것이 가능케 하는 것은 인문학이다. 부자와 중산층들만이 향유했던  이 배타적 도구는 한 학자의 노력에 의해 모두의 도구로 태어난다 .그는 말한다. “타자의 행복을 보장하는 일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라고. 그리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으로써의 민주주의는 모든 것을 무릅쓸 만한 가치가 있는 위험”이라고.


 잡담 1:. 일독을 권한다. 아둔한데다가 글 솜씨가 형편없어 책이 전달하려고 했던 것의 99분의 1도 전달하지 못한 것 같다.
 잡담 2: 기독교가 기득(旣得)교로 보이기 시작한이후로 교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만 가지고 있었는데(예수님은 좋아함) 흑인 빈민층에 정치적 지위를 부여한 것도 교회라는 구절에서 교회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되었다. 


2009년 6월 15일 월요일

[감상문] 데스노트를 보고

데스노트


한 두편 볼 요량으로 킨 컴퓨터였다. 보다보니 5편 10편 눈을 뗴지 못했고, 결국 이틀새에 22분짜리 37편을 다 보고 말았다. 데스노트에 이름을 적으면 죽는다는설정도 흥미로웠지만, 야가미 라이토와 L과의 두뇌싸움에서 오는 긴장감때문에 눈을 뗄 수 없었고, 정신차려보니 마지막 엔딩을 보고 있었다.

처음엔 스트레스 풀려고 아무 생각없이 볼려던 애니였으나, 다 보고 나서는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생각과 착잡함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명확해지는 상징들과 질문이 현실과 무섭게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심판한다는 것과 정의라는 것의 의미다.


흉악범을 죽일 권리

“그런데 2분 후 순식간에 우리들 중 한 명이 가버릴 것이다. 한 정신이 줄어들면 그만큼 한 세상이 좁아진다.”- 조지 오웰 ,<교도관>중에서-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 희대의 살인마 강호순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고 사람들은 그 잔인함에 경악했다. 모자를 쓰는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해야한다는 이야기가 봇물처럼 터져나왔고, 실제로 조선 중앙을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그당시 피해자를 무참히 살해하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이 흉학범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행위를 긍정하는 것 만큼이나 비난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사형제에 대한 논란에서 사형제를 존속해야한다는 여론도 많았다. 라이토가 한국에 있고 이 당시 데스노트를 주웠다면 강호순 이름을 제일 먼저 썻을 것이다. 그런데 라이토는, 혹은 판사는 사람을 죽여도 되는 것일까?

조지오웰은 교도소에서 진흙탕 물을 피하는 사형수의 모습을 보고 ‘의식있는 한 인간을 파괴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한다. 분명 진흙탕 물을 피하려고 하는 의식이 있는 인간이지만 그는 목이 매어 파괴될 것이며 사라질 것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없어질 것이며, 그만큼의 크기가 사라질 것이다. 물론 그정도의 크기가 세상에 필요없다고 판단되었기에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 세상에서의 삭제를 행한다. 하지만 신이 아닌 인간이 인간을 삭제하는 행위는 용납될수있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영역인가? -


내가 정의다.

예전 군대에서 다른 소대에 있는 군종병과 이야기할 시간이 있었다. 그 때 내가 했던 질문은 부시가 악의 축이라고 하는 후세인을 공격하는 것이 과연 신의 뜻이고 정당하냐는 것이었다. 물론 그전에 부시가 공화당이고 그 공화당 대부분은 너희들과 같은 프로테스탄트라는 설명은 했었다. 어떤 대답이 나올까 궁금했는데 간단했고, 섬뜩했다. 그것도 신의 뜻이라는 것이다. 스커드 미사일에 집안이 내려앉아 죽은 딸을 붙잡고 우는 아버지의 영상을 보았던 터라 충격이 더했는데, 과연 그 아이의 죽음도 신의 뜻이란 말인가. 그 다른 우상을 숭배했다는 이유로 그 가족은 스커드 미사일을 맞고 죽어서는 지옥에 가야는 것일까? (혹시 신곡에 나오는 연옥에 있을지도)

쌩뚱맞게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정의의 애매모호함과 자신들이야 말로 정의라고 말하는 자들의 폭력성때문이다. 극 중 라이토는 틈틈히 자신이 정의라고 이야기 한다. 중간에 N과 함께 나야말로 정의라고 하는 장면은 L이 라이토의 발을 씻겨주는 장면과 함께 이 애니의 명장면 중 하나다. 그런데 무엇이 과연 정의인가?

사전에 정의를 쳐보니 첫째로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라고 나왔다. 둘째로 바른 의의 (意義)라고 나왔으며 셋째로 <철학>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 라고 나왔다. 우선 라이토가 생각한 정의는 첫째, 둘째이고, L과 경찰이 생각한 정의는 세번째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이다. 이 두 정의가 싸웠을 때 결국 ‘공정한 도리’가 승리한다. 그는 진다. 아니 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신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의, 불의 , 선 , 악은 언제나 상대성을 띌 수 밖에 없다. 거기에 인류 보편적인 것으로 선을 그어논 것을 우리는 감으로 정의라고 하는데 인간인 이상 그 판단은 완벽할 수가 없다. 만약 라이토가 현실에 있다면 이스라엘 총리와 팔레스타인 반군중 누구를 죽여야하는가? 성서에 쓰여진대로 약속의 땅을 찾은 유대인들은 그들 스스로 정의이고 선일 것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인에게는 예전에 살았다고 2000년만에 들어와 무참히 사람을 죽여대는 불의이자 악일 것이다. 라이토가 더 깨끗한 세상을 만든다고 할 때 데스노트에 적어야하는 것은 누구인가?


라이토가 처음 했어야 할 것

라이토는 처음 데스노트를 주웠을 때 버렸어야 했다. 류크가 말한대로 데스노트를 주운자는 행복해 질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위치로서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받아들인 자의 운명이다. 우리는 신의 판단을 알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다. 단지 가늠할 뿐이다. 자신이 정의가 되는 행위도 할 수 없으며 인간을 삭제하는 행위의 답도 알 수 없다. 단지 질문할 뿐이며 평생 질문속에서 살아야 할 뿐이다.



잡담 1 라이토는 아무래도 반사회적 인격장애자 인것 같다.


2009년 6월 7일 일요일

삼성공화국 -이번 삼성 애버랜드 편법증여 관련 판결을 보고.-

 예전 같은 동아리 친구한테 내가 이런 질문을 한 적있다. "나라가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그 친구는 아무 꺼리김없이 "기업이 통치하겠지." 라고 대답했다. 평소에 그것에 대해 생각을 깊이 했었는지 아니면 어떤 책에서 나온 내용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겐 참 설득력있는 생각이었고 상상하기엔 아찔한 미래였다.
 
그러나 이번 삼성 편법증여 판결을 보면서, 이미 기업이 일정부분 지배하고 있구나 라는걸 확신하게 되었다. 이미 초법을 넘어서 그들은 하나의 막을 수 없는 권력으로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이 인정한대로 이미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일까?
 
예전에 X파일에서 이건희는 베이비들(젊은 검사를 지칭)에게도 얼마씩 주라는 발언을 한다. 사법부중 하나의 축인 검사들이 그에게는 말 그대로 얼라였다는 건데, 무의식이었든 평소에 은어로 그렇게 쓰든간에 그의 말에는 그조차도 끝을 모르는 권력이 녹아있고 자신감이 묻어있다. 그것은 '삼성은 질수 없다.'는 것이다.
 
일련의 삼성 X파일 , 삼성 특검 , 삼성 불법증여 사건들에서 삼성은 항상 승리했다. 이상호 기자님의 폭로는 별 의미없게 끝이 났고 특검때는 진짜 말그대로 부실수사하더니(검사한명에 보조 다섯이던가. 근데 소고기사태때 피디수첩 번역오류찾는데 검사만 다섯명) 특검으로 수사를 하는 검사가 있는 로펌이 삼성 변호를 하고 있는 웃지못할 사태까지 벌어진다. 그리고 특검때도 그러더니만 이번 에버랜드 문제도 삼성 가려운데만 긁어주는 꼴이다. 이런식이라면 삼성은 고소같은 거 다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온갖 편법도 법원이 알아서 법리적으로 면죄부를 줄것이다.
이미 일반인이든 정치권이든 머리속에 삼성은 지지않는다는 생각이 머리를 뒤덮고 있다. 왜냐면 삼성이 지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떄문이다. 이미 그들은 변하지 않는 권력이고 권력조차도 부러워 하는 권력이다. 예전에 정주영 회장이 지금 살아있었다면 굳이 대선출마를 할리가 없을것같다. 권력은 쉽게 변하지만 돈은 쉽사리 안변하기 때문이다. 뭐 망하면 IMF때처럼 세금내서 살려주겠지. 춈스키말대로 기업은 온갖 사회적 책임(치안이나 보안, 사회적 안정망)은 국가에 떠넘겨놓고 지들 이속차리는데만 영리한지 모르겠다. 

2009년 6월 6일 토요일

나를 작게 만드는 TV

나를 작게 만드는 TV

장면1 심수봉씨의 잘먹고 잘사는 법

이른 아침 가게에서 일하시는 아버지는 아침이 항상 늦으시다. 대충 9시 정도가 되어서야 아버지와 아들은 밥상에 앉는다. 여느 한국남자들같이 소통이 서투른 부자에게 어색한 침묵이야말로 하나의 고통이다. 아버지는 리모컨의 빨간버튼을 누르신다.

Tv에서는 스타의 생활을 보여주는 방송에 심수봉씨가 나왔다. 트로트의 여왕, 엘레지의 여왕 심수봉아니던가, 아버지는 흥미가 가시는지 돌리던 채널을 멈추셨다. “정말 맛갈나게 노래부르지”라는 말도 덧붙이시며 회상에 잠기시는 듯 하다. 그 심수봉씨의 생활이 무엇이었을까 하니 몇층되는 자기 건물을 까페처럼 차려놓고 손님들을 맞이하시는 것이랑 쭈욱 정리돼 있는 남편의 재즈앨범으로 남편의 재즈사랑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나로서는 이해가 안가는 인테리어 꾸미기였다. 우리는 서둘러 밥을 먹었다.

장면2-강수진이 될 수없는 이유-

휴학생에게 하루는 길면서 짧다.강의 몇강보면 끝나는 하루인 동시에,그안에 있는 불안과 지겨움은 길디길다. 그 지겨움속에 수요일 밤은 황금어장을 보는 즐거운 날이다.오랜만에 TV화면 앞에 앉는다. 쉬는 순간도 삶의 불안은 앉은 방석을 따끔따끔하게 한다. TV에는 발레리나 강수진씨가 나왔다. 그녀의 경이적인 모습에 감탄하고, 교훈을 얻는다. 아름다움에 숨겨진 그 고통을 본다. TV를 끄고 결심한다. 노력해야지, 죽을만큼 노력해야지 그 피눈물나는 노력을 해야지. 그러나 결심은 오래가지않는다. 이미 지금이 한계라는냥 더 이상 올라가주지 않는다. 이 땅의 많은 학생들도 같은 결심을 했을까? 슬픈 것은 그녀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이고, 궁금한 것은 내가 그녀처럼 되야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다는 사실이다.

장면3-별들의 소개팅-

주말이 되어 잠시 TV앞에 앉아있다. 원래는 무한도전밖에 안보지만 답답한 마음에 TV를 일찍 켰다. TV에서는 스타 친구를 소개합니다 라는 프로가 하고 있었다. 스타들이 나오고 주선자들의 소개가 나온다.하나같이 잘생기고 이쁜 이 사람들의 직업은 쇼핑몰 사장, 기상캐스터, 유학파 학생 등등이다. 요즘 결혼 정보회사는 등급을 매긴다는데 이들은 몇등급일까?

불행상자를 끄다.

오늘부터 TV를 보지 말아야겠다라는 결심과 함께 이 글을 시작한다. 불행한 사람이 TV를 훨씬 오래 본다는 충격적인 연구결과를 보고서 행복하려면 TV스위치부터 끄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바보상자네 뭐네 이야기가 많은 물건이었지만 삶의 최고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행복마저 잡아먹는다고 하니 등골이 오싹하다. 연구진은 “이처럼 상반된 결과는 TV가 잠시 기쁨을 줄 수 있을진 몰라도 장기적인 불행감이 뒤따른 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찰나의 기쁨뒤에 장기적인 불행감이라, 단지 띨띨한 바보상자로 보았는데(바보는 오히려 행복할는지 모른다) 생각보다 무서운 불행상자였던 것이다.

요즘 막장 방송들 마냥 처음부터 너무 독한지 모르겠다. 그럼 방송을 만드는 그 많은 PD와 작가들은 불행을 퍼뜨리기 위해 그렇게 불철주야 노력을 했던 것일까? 얼마전 KBS 연예대상에서 황현희 씨는 개그 콘서트를 유해 프로 1위로 선정한 단체를 향해 아이디어 회의하는 것을 한번이라도 본다면 그런말을 못할 것이라고 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방송인들의 노력과 열정을 보면 불행상자라는 말은 감히 못할지 모른겠다 .하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최악의 결과는 항상 최선의 의도로 시작’되는 법. 노력과 결과를 등치해서 봐달라? 투정도 이런 투정이 없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지만 여기 낄 말은 아닌 듯싶다. 그것이 부동의 매체 영향력 1위, 제4권력, 그 결과물만 시청자가 볼 수 있는 TV라면 말이다.

그럼 이 바보상자는 왜 불행상자가 되어버렸을까? 이를 알기 위해선 당연하지만 간과하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싶어 보는 이 프로그램은 누군가가 만들어서 내보내는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프로그램은 연출가의 결과물이다. 연출가는 세상속의 무궁무진한 소재중에서 주제를 설정하고 포맷을 설정하고 주인공을 설정한다. 연출가가 관심을 가져준 대상, 소재 그리고 인물은 우리의 관심밖에서 관심의 영역으로 자연스레 들어오게 된다. 이 때 이 단순한 행위속에서 객체가 겪는 변화는 새로운 창조에 버금가는 것이다. 무관심에 숨겨져 있었던 객체는 매체를 거쳐 관심의 영역으로 오게 되고 하나의 주체가 된다. 어느 소설가의 후기처럼 무엇을 만든다는 것은 신의 영역과 맞먹는 일일지 모른다. 그런데 이 선택이 불어놓은 숨결은 어떤 존재를 관심의 영역에 끌어오는 동시에 다른 존재들을 자연적으로 제외시킨다. 문제는 그 제외가 사회적 계층구조와 맞물려 소외로 이어질 때이다. 그럼 예능이 선택한 주인공들을 보자.

- 황금어장-

절대 시덥잖치 않은 분들의 시덥잖은 고민

먼저 황금어장에서 나오는 주인공 다시 말해 토크 의뢰인들을 살펴보자. 대다수의 사람도 고민하지 않을 것같은 시덥잖은 고민을 들고 오는 의뢰인들은 전혀 시덥잖은 사람들이 아니다. 유명한 배우, 가수, 세계적인 발레리나, 소프라노, 역도선수 등 그들은 그들의 분야에서 톱을 달리는 사람들이다. 누구도 부러워 할 재능, 피나는 노력, 뜨거운 열정을 가진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없다. 운마저도 그들에게는 당연히 따라 올 선물인듯 보인다. 또 라디오스타에서 무릎팍도사에 가시지 왜 여기 오셨냐는 문희준의 말에”야 형이 아직... 왜그러냐” 라며 부끄럽게 얼버무리는 성진우의 말처럼 여기오는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급이 되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이지만 그 삶의 영광 속에는 왠만한 사람은 감당 못할 시련도 있고 사연도 있다. 이들의 성공스토리와 진솔어린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온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잠자리에 누울시간, TV속 의뢰인은 내일의 다짐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벅찬 감동이 가라앉고 차갑게 마주앉은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불안을 경험한다. 이 불안은 어제의 벅찬 감동을 고까운 감정으로 바꿀 수도 있을 만큼 작지않은 것이다. 여기서 마주한 불안의 정체는 무엇일까?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이란 책에서 현대인에게 다가온 불안에 대해 몇가지 진단을 한다. 그 중 하나는 근대에 발생한 자유가 가져다 준 불안이다. 근대에 이르러 우리는 우리를 가로막는 모든 계급에서 벗어났다. 우리는 ‘표면적’으로 무한히 자유롭다. 그 자유속에서 우리는 성공에 대해서도 자유롭다. 우리는 우리들의 노력등에 따라 가수 비처럼 될수도 있고, 영화감독 류승완 처럼 될 수도 있으며, 발레리나 강수진처럼 될 수도 있다. 이 무한히 열린 가능성은 우리에게 하나의 선택으로서만 다가오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그런 무한한 가능성속의 당신의 위치, 즉 왜 당신은 강수진처럼 비처럼 될 수 없는 것인가?

그 답은 그들의 성공스토리에 있다. 당신은 장미란 같은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당신은 이준기처럼 무모하게 달려들지도 못했다. 당신은 강수진처럼 하루를 치열하게 살지 않으며, 비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다. 당신에게 선택으로서만 다가오는 듯 보인 성공에 대한 자유는 사실 여러 요소들의 집합체다. 하지만 착각이 현실에 부딪혀도 우리는 그들을 외면할 수 없다. 성공신화에 빠진 한국에서 그들은 하나의 지향점이며, 그들은 화면속의 주인공인 동시에 사회의식 속에서도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당신과 이들의 간극은 그만큼의 불안과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이는 의식적 감동 속에서 만들어진 무의식적 불안이다. 도란 도란 살아가는 대다수의 시민들이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주인공일텐데 옛날로 치면 광대와 기능인들이란 작은 지향점은 성공고문을 하며 사람들을 옭아맨다.

스타의 잘난 친구를 소개합니다.

예전 불문과 교수의 교양강의를 듣다가 파리의 대학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 그 교수님에 따르면 파리에서도 엘리트만 다니는 서울대같은 곳이 있지만 그 대학이 문화등 어떤 면에서도 중심을 서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물론 미디어도 이들에게 관심을 쏟지 않는다. 서울대 교수들 시국선언이 대서특필되고 다른 총학생회는 안나와도 서울대 고대 총학생회 이야기가 언론에 흘러나오는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신기한 문화적 차이였다. 동시에 떠오르는 의문, 사회적 문화적으로 만들어진 주류라서 미디어가 비춰주는 것일까? 미디어가 비춰줘서 주류가 되는 것일까?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이 근원적 물음은 스친소에도 동일하게 던질 수 있다. 스타의 친구들을 보고 싶어서 ‘스타의 친구를 소개합니다(이하 스친소)’가 나온 것일까? 스친소가 나와서 스타들의 친구들을 보고 싶은 것일까? 혹시 답은 고등학교 객관식 최고의 답이었던 상호보완적인걸까?

떠올려보면 스타에 관한 프로그램은 소재에서 계속 영역을 넓혀왔다. 단순히 토크쇼에 나와서 사회자가 질문을 하고 듣는데서 만족하지 못한 대중은 스타의 사생활(MBC 섹션TV 연예통신)을 보고 싶어하고, 스타들의 친구들을 보고 싶어하며(KBS2 반갑다 친구야) 심지어 스타들의 아이들(SBS 스타쇼 붕어빵)까지 보고 싶어한다. 이런 대중적인 요구를 생각해볼 때 스친소는 이쯤에서 나올만한 프로그램중 하나였음에 틀림없다. 그동안 프로그램적으로 별 변화없이 내용을 유지했다는 것은 시청자가 그만큼 큰 충격없이 이를 잘 받아들였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시청자의 요구에 반응하여 나온 스친소이지만, 이를 보는 시청자들의 입장은 편치않다. 스타가 데리고 나온 이 ‘일반인 아닌 일반인’을 어떤 시선으로 봐야할지 당황스럽기 때문이다. 이는 스타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우리들은 스타를 스타로서 바라봐 줄 자세가 되어있다. 스타는 이야기 속에 송혜교네 김태희네 라며 회자되는 친근한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길가다가 누구 봤네라고 자랑할 만한 대상이기도 하다. 코디, 매니져가 아닌 이상 스타들은 별천지에 사는 사람들이고 , 그러한 암묵적합의속에서 스타들은 살아간다. 하지만 그 스타들이 데리고 나온 친구들에 이르면 이야기가 틀려진다. 스타의 후광을 업고 나오는 그들이지만 그들은 우리와 같은 일반인의 범주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프로그램 시작 얼마 지나지않아 시청자는 그들이 일반인이 아닌 일반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잘생기고 키큰 유학파 출신 학생, 날씬하고 잘 빠진 쇼핑몰 사장 등등 그들이 내뿜는 후광은 스타들의 후광 못지 않다. 그리고 그들과 스타가 합쳐져 하나의 무리를 그려낼 때 보이는 것은 웬만해선 다가갈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이다. 결혼 정보회사 1등급을 모아논 듯한 이 별들의 소개팅은 대부분 청춘남녀들의 삶과 사랑을 비주류로 몰아 넣는다.

소외를 넘어서

‘백만장자의 쇼핑백(ETN)’을 보고 있는 여고생, 혹은 여대생은 저 라이프 스타일을 누릴 능력이 있는 것일까? 그들에게 저 프로그램은 과연 프로그램 의도처럼 ‘정보’일까? 여고생은 보고 싶어하는 프로그램을 보고 자본주의적 욕망과 불안 속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진 않았을까?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스스로를 소외시킬 수 있다. 우리는 보고 싶어하는 프로그램과 내가 보면서 행복할 프로그램의 차이를 알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바보상자의 진행형, 그리고 연결점은 불행상자이다. 우린 바보처럼 웃으며 보고 난 뒤 불행해질 수 있다. 이는 연출자에게 새로운 책임을 부여한다. 연출자는 실적 증가치(=시청률) 쫓는 영업사원(=PD) 마냥 시청자들의 요구에 기계적인 제공만을 해서는 안된다. 휘발하는 웃음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해서도 꾸준히 관심을 쏟아야한다. 웃음에서조차 제외된 존재에 대한 시선이 필요하고, 높아가는 위화감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한다. 그들이 PD가 되었을 때 많이 들었을 전파의 사용에 대한 책임과 지상파의 공영성은 미디어의 영향만큼이나 크기 때문이다.

굿모닝 아니 굿바이 미스터 오웰

개인적으로 백남준씨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품을 좋아한다. ‘TV는 인간을 폭압하는 수단’ 이라며 1984년이 되어 빅브라더가 모든 것을 통제할 것이라며 경고한 오웰에게 백남준은 1984년이 되자 아무 일도 없지 않느냐며,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란 퍼포먼스를 했다. 온갖 걱정을 다 한 사람들에게 이거봐 아무일 없었지라며 기술, 나아가 사람에 대한 믿음과 따듯함을 보여준 백남준씨가 존경스러웠다.

지금 나는 내가 오웰이길 바란다. 예능 프로들때문에 소외와 불안이 확산된다는 내 생각을 연출자들이 보기좋게 뒤집었으면 한다. 내 모든 걱정들이 기우이자 착각이었으면 한다. 예능에서의 따뜻한 웃음을 다시 느껴 봤으면 한다. 건강한 웃음이란 인생에서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고, 그 즐거움 속에 우리는 행복을 더 윤택하게 가꿀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웃음상자 TV의 출연을 기대해본다.